괘도 생각 21세기 학생들의 발표를 듣다 보면 80년대의 발표 풍경이 간혹 생각나곤 한다. 80년대 국민학교 때에도 간혹 발표 수업이 있었다. 발표를 배당받으면—아니, 나는 지원했던 것 같다—문방구에 들러 전지와 매직을 사서는 집에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에 1미터 정도 되는 전지를 펼쳐 놓고, 그 옆에 참고서와 파란색, 검은색, 빨간색 매직을 꺼내 놓으면 준비 끝. 참고서 내용을 쑥 훑어보고 마음을 정한 후에 매직 뚜껑을 열면 강한 잉크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전지에 한 글자씩 쓰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간혹 매직과 종이가 빚어내는 마찰음도, 잉크가 줄어들면서 글자의 농도가 변하는 것도. 다 쓴 후에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둘둘 말아 책상 옆에 놓아둘 때 드는 묘한 달성감도.발표 수업은 그.. 더보기 한밤의 산책 올 1월에 이케부쿠로에 있는 한 대학의 초청으로 오랜만에 도쿄에서 한 달간 머물 기회가 주어졌다. 에어비앤비(Airbnb)로 구한 숙소는 이케부쿠로역을 끼고 학교와 정반대에 위치한 탓에 학교를 오갈 때면 역 지하를 관통해야만 했는데, 그곳에서 매일 격전을 벌이는 백화점 식품관의 매혹적인 냄새를 참아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애써 길을 돌아가던 시절도 한참 지났는데 말이다. 이자카야나 바에 들러 혼술을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귀찮아져, 숙소 근처 슈퍼에 들러 와인 한 병을 사 가지고 들어와 TV를 보며 잔을 기울인다. 애초에 술에 강하지 않은 데다 혼자 마시는 탓에 한두 잔만으로도 금방 취기가 돈다. 그러면, 어김없이 헤드폰을 끼고 패딩.. 더보기 벌집 1 “이리 와 봐, 저기 벌집이 생겼어” 아내의 말을 듣고 가봤더니 정말 벌집이 윗집 베란다와 우리집 그것 사이에 들어서 있었다. 난감했다. 누수, 정전 등 살면서 겪는 사소한 트러블이 발생하면 난 늘 난감하다. 솔직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을 불러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런 나를 아내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늘 그런 문제들을 손수 해결하면서 살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까. 언젠가 장인어른께 그런 문제에 서툴다고 했더니, 그게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하다 보면 다 하게 되어있다고 하시더라. 맞는 말씀이긴 한데, 우리 집안 남자들은 어느 산촌의 몰락한 양반의 '나쁜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있는 모양인지 손쓰는 일 중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과 자식들을 보면서.. 더보기 어떤 장례식 ▷ 3월 어느날 밤 모교 과동문 단톡방에 L교수의 부음이 떴다. 평소 누군가의 육친의 부음이 뜨면 조의를 표한다는 말이 줄줄이 달리곤 했지만 조용했다. 함께 조의를 갈 사람을 묻는 말에도 반응은 거의 없었다. 나는 거의 십여년 전 홈커밍 데이에서 본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간은 세월이 지나면 누구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지만, 실감으로서는 하나도 안 변하는 사람과, 생각보다 많이 늙어 보이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날 본 L교수는 후자였다. 느린 걸음에 누군가의 부축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나는 멀리서 그걸 바라볼 뿐 굳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주변의 선후배들과 마찬가지로. L교수는 문학사와 일본사정을 가르쳤는데, 강의는 그저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 텍스트를 한줄한줄 읽고 해석하고 몇마디.. 더보기 히데오 만나기2 1. 지난 주말에 보스턴에 다녀왔다, 히데오를 만나러. 7년 전 도쿄의 키지조지에서 만난 이후로 그와는 종종 메일을 주고받았다. 메일이 올 때마다 그의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의 이혼과 오사카로의 이동. 새로운 파트너가 생길 때마다 바뀌는 성(姓). 새신부와 한국에 오겠다고 했지만 번번히 무산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온 메일에는 미국 여성과 만나서 결혼을 할 예정이며, 그녀와 보스턴으로 갈 생각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아는 히데오와 현실의 히데오의 간극이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히데오가 그러는 사이에 나는 늘 똑같은 연구실과 강의실, 그리고 집을 오갔다. 더러 교내, 혹은 외부 회의에서도 참석했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는 일은 없다. 나는 대학 내외의 파워.. 더보기 '바깥'에 관하여 9월에 26년만에 JFK를 통해 맨해튼에 왔다. 여전히 맨해튼은 복잡하고 더럽고 비싸고 비현실적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는 그저 담담할 뿐이다. 그게 조금 이상했다. 나이를 먹은 탓일까, 아니면 세상이 변했기 때문일까. 아마 둘 다겠지. 특히 후자와 관련해 구글과 우버가 있는 세상은 그렇지 않을 때의 세상에 비해 너무 편해졌다. 이제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표현은 스마트폰의 전원이 나갈 때나, 관념적인 표현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닐까. 이제 길을 잃어버릴 걱정이 없는 나는 낯선 곳에서도 태평하게 길을 걷고, 레스토랑을 검색해 쌀국수를 먹고, 문득 로스코가 생각나 MOMA에 들려 그의 그림을 본다. 20세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나는 담담하게 해낸다... 더보기 새차 세차 1. 지난 일요일에 작은 형이랑 세차를 했다. 사실 한달 정도 전에 십년 넘은 차를 바꿨는데, 그 차의 구입 과정은 여러가지로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대기 시간이 1년을 넘어가는 와중에 담당하던 영업사원이 은퇴를 해야 했고, 새롭게 배정된 영업사원과는 합이 맞지 않았다. 출고 일시 문제로 몇 차례 전화로 다투고 거의 포기할 시점에 나온 차는, 검수 과정에 하자가 있어서 돌려보냈다. '대체 차가 뭐라고, 그깟 차 하나 때문에'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는데, 그 때마다 작은 형은 차의 중요성에 대해서 집요하게 환기시켜줬다. 사실 구매 때부터 형은 명실상부한 지름신으로서의 역할을 아주 충실히 수행해, 형과 통화 한번 하고 나면 차종이 바뀌고, 또 한번 통화하면 차의 옵션 등급이 바뀌어 어느틈에.. 더보기 자유 수영 레인 20년 동안 수영을 했지만 오랫동안 나는 평형과 접영을 할 줄 몰랐다. 한번도 배운 적이 없었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처음 배운 것은 유학 직전이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일본에 가기 전 한달 동안, 나는 동네에 새로 생긴 스포츠센터 지하에 있는 수영장을 딱 한달 동안 다녔다. 아침 6시 초급반. 한 여름인데도 물은 너무 차가웠지만 어깨가 떡 벌어진 여자 강사님의 우렁찬 소리에 후다닥 들어가 발차기를 하고, 호흡을 배우고, 자유형과 배형을 배웠더니, 한국을 떠날 날이 다가와 있었다. 일본에서 수영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살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허리가 아파서 패닉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 원초적인 공포가 초급자인 나를 수영장으로 인.. 더보기 이전 1 2 3 4 ···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