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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24년

1.

24년만이다, 혼자서 열차를 타고 낯선 곳을 헤매게 된 건.

혼자 떠돌며 '24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실은 몇 년 전 안식년 때에 생각하기로 했으나 팬데믹으로 미국행이 좌절된 이후 자연스럽게 뒤로 미뤄졌다. 언제 한번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하는 와중에 안식년이 끝났고 잡일에 시달리게 되었다. 잡일을 하는 사이에 문득 찾아온 기회였다.

그러나 실은 냉큼 잡지도 못하고 주저주저하다가 마지못해 누군가에 떠밀린 듯 항공권을 구매해놓고도 뭔가 짜릿한 해방감을 느끼기보다는 마지막까지 항공권 취소를 고민했었다.

이런 주저함은 24년 전에는 없던 일이다. 24년 전 여름 뉴욕을 갈 때, 그러니까 IMF 직후 찾아온 기회를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냉큼 받아들였다. 겁도 없이 한번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겁도 없이 열차표 하나만 들고 한달간 대륙을 횡단했다.

그로부터 24년 후 짧은 일정의 독일의 철도 여행. 유레일이 아니라 독일 철도레일 이용권을 구매한 것에도 현재의 위축된 내 자신이 반영되어 있겠다. 실은 패스도 끊지 않고 어느 도시에 짱 박혀 있고 싶었는데 첫 출장지가 공업지대인지라 베를린으로 이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베를린이 너무 더워서 다시 이동해야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24년 전이라면 베를린 다음으로 함부르크가 아니라 프라하를 갔을 것이 틀림없다. 혹은 렌트를 해서 스웨덴으로 갔을 지도.

2.

귀국하는 연구팀과 헤어져서 홀로 남게 되자 겨우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웹을 통해 예약하고, 열차 안 와이파이로 다음 스케줄을 잡는 열차 여행은, 내가 직간접적으로 이제까지 경험했던 그것과는 너무 달랐다. 40여년 전 다와다 요코가 했었던 열차여행은 물론이거니와, 24년 전 두툼한 열차 시간표 책을 들고 공중전화 수화기로 안되는 영어로 스케줄을 잡아야 할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긴 시간을 걸쳐 축적된 '그곳'을 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새로운 여행 방식 속에서 빠르게 형해화되어 갔다. 그러니까 스마폰 위의 웹 사이트를 손가락으로 스크롤할 때마다, 일테면 다음과 같은 문답 속에서.

Q : 굳이 지금, 거기를 가야할까?
A : '지금'이 아니더라도, 열차는 2시간마다 있습니다. 같은 거리라면 B시와 C시, D시가 있습니다.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굳이 '거기'가 아니더라도 된다는 정보는 분명 나를 안심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그곳에 가고 싶다는 욕망을, 욕망이 아닌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한 때 열망했던 것이 얼마든지 엑세스 할 수 있는 정보의 형태로 출현했을 때, 그 미래형의 욕망은 마치 흉터 같은 과거형으로 변모해버렸다.

빠르게 달리는 열차 창문 바깥으로 펼쳐지는 유럽의 풍경을 보면서 나는 왜 그토록 유럽을 보고 싶었는지를 되물으면서, 욕망으로서의 유럽과 정보로서의 유럽, 과거와 현재 사이의 간극을 왔다갔다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결국 '그 때' 왔었어야 했다고 탄식하는 나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이 더 할 나위없이 간절했던 '그 때'에.

3.

그건 2010년대 중반에 처음 중국을 가서 느꼈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것이기도 했다.

90년대나 2000년대 중국을 경험했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건너뛴 채 내가 처음 경험한 중국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마치 건축쇼를 하듯 지어진 건물들이 즐비한 텐진 강가를 걷거나 높은 곳에서 상해의 야경을 보면서, 소세끼 같은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줄곧 이야기했던, 서구가 몇 백년에 걸쳐서 이뤘던 근대화를 압축적으로 경험함으로써 파생되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은, 어쩌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처음 생각했었다. (그 때 중국을 안 본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두가 다 긴 아날로그를 거쳐서 디지털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디지털로 시작되는 사회도 있을 수 있다고. 뭔가 단계적 발전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도 어쩌면 먼저 시작한 이들이 만들어낸 환상일 수 있겠다고. 메카닉, 혹은 아나로그 시대의 강자였던 유럽을 보면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 느꼈던 열패감은, 그런 환상의 산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작 유럽을 직접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관철하고 싶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시간을 루프한 나머지 '지금'이 언제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려, '지금'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그렇다면, 그럼에도 여전히 내 눈 앞에 있는 '지금'은 또 뭐란 말인가?
이 역시 12년만 지나면 또 다시 후회할 '지금'은 아닐까?

알프스 근처에서 여름을 보내려고 이동하는 독일 노인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24년 전에도 은퇴 후 열차 여행을 하는 노인들을 보긴 했지만, 그냥 조금 부러웠고 내 일이 아닌 듯 했다. '은퇴 후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내 예문 사전에는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은퇴 후가 조금은 가깝게 보이는 요즘에는 그들의 모습이 내 일처럼 느껴져 유심히 보게 되지만, 그래도 역시 그 문장을 내 예문 사전에 넣고 싶은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24년 전에 수록된 '컨베이어벨트 같은 인생이 싫어서'라는 예문 때문인지도 모른다.

5.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내 자신이 '컨베이어벨트'에 타버렸음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컨베이어벨트가 주는 안정감은 상당했고, 심지어는 '지금'에 대한 의미까지 씹어먹어 버렸다. 어느 순간, '지금'은 퇴직까지 00년이라는 형태로 단순화되어 뼈속 깊이 각인되었다. 미시마 유키오나 장정일이 그토록 증오한 '과정형 인간'이 되고 만 셈이다.

............실죽실죽 웃으며, 찰랑찰랑 탬버린을 흔들며 그가 내게 말했다. 너도 탬버린 치는 남자가 될껴! 찰랑찰랑, 찰랑찰랑, 너도 나처럼 대학원을 마치고 엘리트가 될껴! 학점을 벌고 시험공부를 하여 오백억짜리 빌딩에서 일하게 될껴! 찰랑찰랑. 너도 나처럼 밤늦도록 컴퓨터를 만지게 될껴! 찰랑찰랑, 찰랑찰랑. 그러다가 폭풍이 몹시 친 다음날, 너는 회색 빌딩 숲에서 외로이 웃는 탬버린 치는 남자가 되는 거지! 천둥치고 비바람 부는 날,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만진 사람은 모두 탬버린 치는 남자가 되는 거지! 쾌청한 거리에서 혼자 웃는 미치광이가 되는 거지!.......... 올림픽이 한창 진행중인 구월말............ (장정일, 아담이 눈 뜰 때 , 93쪽)


바로 내 '지금'이 의미를 잃고 정체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이다. 모든 심적 혼돈이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기껏해봐야 폭 1미터의 컨베이어벨트 위의 장난질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벨트는 견고했다. 재료만 올리면 시간이 지나면 척척 제품이 되어 나오는 공정처럼, 말이다. (아, 이 위대한 기계 같은 제도(?)를 만드신 엘리트님들이여!)

물론 그 중에는 불량품도 섞여 있었지만 그래도 벨트는 돌아갔다, 척척. '지금'은 다음 공정을 위한 좌표에 지나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경험한 모든 우연들이, 그 우연들이 빗어낸 '지금'들이 마치 필연인양 벨트 위로 흘러들어와 '의미'가 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면서 많은 '지금'이 산란되었다.

의미가 되지 못하는 '지금'이 실은 다가올 '지금'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인데,
모든 것이 의미가 되는 '지금'은 실은 영원한 무의미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6.

그렇다고 이제와서 벨트에서 내려와 '자연인'이 될 수도 없고, 어쩐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퀠른, 하노버, 베를린,라이프치히, 함부르크를 거쳐 만하임에 도착했다. 만하임에 잡은 호텔에 체크인을 한 후에도 해가 중천이라, 쉴까 하다가 로컬 선으로 하이델베르크로 이동했다.

A: 넌 여기까지 와서 또 대학이야!
B : 왜 그래, 베를린에서도 홈볼트니 자유대학이니 근처도 안 갔잖아.
A: 라이프치히 대학 들렸잖아!
B : 열차 시간이 남아서 그랬잖아. 암것도 없었구.
A : 에구.

밋밋한 풍경을 보면서, 24년 전에 봤던 대학들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게 뭐라고, 마치 성지순례라도 하듯이 갔을까? 그곳이 내 무의식이고, 컴플렉스라면-뭐, 결국 그렇겠지만-, 지금도 대학에 있는 나는 평생 무의식을 마치 의식인양 살고 있는 것일까? 이 의식 같은 무의식의 기원인, 오래된 대학에 간다고, 또 뭐가 달라질까?

모든 게 지겨워져 대학에 들어가는 대신, 다리를 건너 철학자의 길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산이 보여서 맘이 놓였는데, 길은 산 중턱에 있었다. 더운 날이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올라갔더니 성곽이 한 눈에 보이는 경치가 펼쳐졌고, 좀 걷다보니 어느 수풀 속에 휠더린과 하이데거 이름이 새겨진 돌비석이 있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지금'이 느껴졌다.

6.

어머니는 대화 도중 가끔 내게 말씀하신다. "얘는 높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어. 높은 공부를."
'어둠의 시절'에 어머니가 스님에게 물어봤더니,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높은 공부'라는 말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져서 늘 웃기다. 특히 그 말이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더더욱. 내가 공부한답시고 긴 세월을 보낸 동안 깨달은 것은 공부에는 높낮이가 없다는 것인데, 그 스님은 어쩌자구 공부에 높낮이를 매겼을까? 낮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높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리가 만무할 텐데, 말이다.

그래도, 종종 그 말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를 때가 있다. 컨베이어벨트 안에서 뭔가를 찍어내듯이 글을 쓰고 있다고 스스로 느낄 때. 그러니까 기계적인 글쓰기임을 느끼면서 쓸 수밖에 없어 긴 한숨을 토해낼 때, "높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아,아, 어쩔~

하이데거와 휠더린이 옛 성곽을 보면서 걸었던 길에 잠시 멈춰서 담배를 필 때도 쓰나미처럼은 아니지만 문득 생각났다.

나는 못하고 있지만 분명 '높은 공부'를 하셨을 그분들, 그들이 이 길을 걸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설마 '독일의 인문학'이라는 공장의 컨베이어벨트를 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거나, 은퇴까지 남은 시간을 카운트다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높은 공부'를 하셨을 그 분들은, 그냥 컨베이어벨트만 돌리시지 어쩌자고 '높은 공부' 따위 해버리신 걸까? 이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살다보니 의도치 않게....?!

나도, 아니야, 나는.

7.

그 때 느껴진 '지금'은 좀처럼 언어화되지 않지만, 몇번이고 추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음에 들어와 남는다. 그런 '지금'들이 무한하게 계속되면 좋으련만, 마음의 용량은 클라우드처럼 돈으로 넓힐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옛날의 강렬함을 넘어서지 못하는 '지금'들은 바로바로 폐기처분된다. (노인들의 심드렁함은 대체로 이 때문이겠지)

지난 10년 동안 해외에서 묶었던 호텔방에 대한 기억은, 24년 전 가까스로 구한 하스텔 침대의 기억을 여전히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호텔이 아무리 좋아도, 혹은 좋았던 만큼 그 기억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다.

강렬했던 24년들의 갖가지 '지금'들을 생각하느라, 또 다시 신기루처럼 사라질 하룻밤의 '지금'은, 그냥 하룻밤 묵었다가 가는 호텔방처럼, 애도의 대상도 되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