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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

'피로사회'에서 '피로사회'로 올 상반기에 많이 회자되었던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이제 읽다. 여러가지로 유익한 대목이 많았지만, 아감벤에 대한 지나친 의식이 조금 안타까웠다. 물론 나로서는 저자의 아감벤 비판에 대해서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다음 대목: 아감벤은 주권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폭력의 공간구조적 변화를 전혀 포착하지 못한다. 성과사회의 한복판에서 아감벤은 주권사회를 기술하고 있다. 아감벤 사상의 시대착오적 성격은 여기서 기원한다. 이러한 시대착오로 인해 그가 추적하고 폭로하는 폭력은 오로지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정성의 폭력에 국한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에 특징적인 긍정성의 폭력, 고갈과 포섭으로 표출되는 폭력은 아감벤의 시야를 벗어난다. ...(중략)...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더보기
실타래를 쥔 고양이처럼 세속화의 기관으로서의 놀이는 도처에서 쇠퇴하고 있다. 현대인이 더는 놀 줄 모른다는 것은 새로운 놀이와 기존의 놀이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증가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실제로 춤이나 파티같은 놀이에서 현대인은 자신이 거기에서 찾을 수도 있는 것(잃어버린 것의 축제에 다시 접근할가능성, 성스러운 것과 그 의례로의 회귀)과 정반대의 것을 필사적으로 집요하게 찾는다. 그것도 스펙터클한 신종종교나 시골 무도회장의 탱고 레슨에서와 같은 어리석은 의식의 형태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의게임쇼는 새로운 예배의식의 일부이다. 이런 게임쇼는 종교적 의도를 무의식적으로 환속한다. 놀이에 그 자체의 순전히세속적인 사명을 되돌려주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과제이다.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더보기
殉死 자신이 친히 데리고 있던 그들이,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타토시도 믿고 있었다. 따라서 순사(殉死)를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만약 자신이 순사를 허락하지 않은 채로, 그들이 살아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가신 일동은 그들을 죽어야할 때에 죽지 않는 자, 은혜를 모르는 자라고 생각하며, 비겁자라고 업신여기리라. 그것만이라면, 그들도 혹은 참고 목숨을 미츠히사에게 바칠 때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대의 주인은, 그들이 은혜를 모른다는 것도, 비겁자인 것도 모르는 채로 그들을 데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그들이 참을 수 없으리라. 그들은 얼마나 분하게 생각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타다토시는 「허락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모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