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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통로의 장소성

S아파트 단지의 재건축 공사가 시작되어서, 더 이상 그 단지를 통해서 부모님 댁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올림픽이 열리던 해 이 동네로 이사온 이래로 S아파트 단지는 내게 있어서 각별한 추억이 깃 든 곳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그 단지를 통해서 독서실을 다녔는데, 가기 전에 꼭 들려서 담배를 피던 곳이 있었다. 1동과 2동 사이의 수풀이 우거진 비상도로 곁으로 쭉 늘어져 있었던 조경석 중 하나가 그곳으로, 나는 거기서 청솔이나 88, 그리고 디스를 피웠다.  

 

시간대는 주로 저녁 7-9시 사이였고,  때로는 딱 한 개피 필 시간을, 때로는 서너 개피 필 시간을 거기서 보내고 S 아파트 맞은 편의 독서실에 가면, 독서실 주인 할머니가 시계를 보며 출입 시간을 기입했다.  한번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기 힘들어서 간혹 4층 남자 화장실 창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곤 했다. 남자 화장실 창문에서는 S아파트가 보였다.       

 

총 5동밖에 되지 않는 S 아파트의 저녁은 한적했고,  더러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주 상류층이 사는 아파트는 아니었고, 90년대에 이미 낡은 아파트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래도 엄연한 '중산층'들의 집이었다. 그 단지 건너편 빌라촌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나는 한 번도 S 아파트에 사는 삶을 상상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모습으로, 다른 곳에 살고 있겠지. 

 

결국 내게 S 아파트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의 통로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통로로서 장소성은 매우 각별한 것이었다. 내 10대 시절의 저녁 시간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담배를 피며 멍 때릴 수 있었던 나만의 은밀한 장소이자, 나를 위해 마련된 곳은 아니었지만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었던 장소.  

 

이제 남의 아파트 단지 안에서 그런 장소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나도 이제는 그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