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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 일본에 온 이후 한동안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꼭 본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카운트다운 TV”라는 음악 차트 프로그램.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가는 새벽 12시 50분, 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가, 이런저런 일들을 중단하고 이 프로를 봤다. 처음에는 최신 유행가 차트를 알기 위해서 꼭 챙겨보곤 했는데, 일본에 온 날들이 길어지는 징후를 보이다가, 결국 길어지고 말았을 때부터는 챙겨보는 일은 없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보고 싶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5주 연속 1위가 없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무리 강력한 음악도, 내 기억에 의하면 3주를 넘기는 일이 없었는데, 그건 일본 음악 마켓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처럼 보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자 어떤 패턴이 읽혀졌다.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나자 다 똑같이.. 더보기
殉死 자신이 친히 데리고 있던 그들이,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타토시도 믿고 있었다. 따라서 순사(殉死)를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만약 자신이 순사를 허락하지 않은 채로, 그들이 살아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가신 일동은 그들을 죽어야할 때에 죽지 않는 자, 은혜를 모르는 자라고 생각하며, 비겁자라고 업신여기리라. 그것만이라면, 그들도 혹은 참고 목숨을 미츠히사에게 바칠 때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대의 주인은, 그들이 은혜를 모른다는 것도, 비겁자인 것도 모르는 채로 그들을 데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그들이 참을 수 없으리라. 그들은 얼마나 분하게 생각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타다토시는 「허락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모리.. 더보기
아버지의 귀 한국에 갔을 때, 무심코 아버지의 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아버지, 귀가 커졌잖요! " 내 말에 다들 정말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어릴 적, 삼형제 중 유일하게 나만이 아버지의 닮은 꼴이라고 불리곤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가 각자의 방식으로 퇴화를 시작했다. 폭식과 폭주와 담배와 운동을 좋아하고, 잠이 없는 아버지의 피부는 60이 넘으면서 한꺼번에 쭈그러들었고, 술을 멀리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늘어지게 자는 나는 동년배에 비해 퇴화의 속도가 비교적 늦다는 얘기를 듣는다. 따라서 요새 우리가 닮았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우리 둘이 닮았다는 것을 여전히 말하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남들이 늘 지적하는, 우리둘의 큰 눈이 아니라, 바로 작은 귀였.. 더보기
미시마 유키오 VS 전공투 미시마의 영문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전공투와의 토론 영상을 발견하고, 한참 보면서 웃었다. 글로 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화상 속의 분위기를 보니, 뭐랄까 음성언어가 수록된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를 툭툭 쳐내고는, 세월이 지나면서 한없이 무거워지고 말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그 느낌은, 유튜브의 이 영상 밑에 달린 다음의 코멘트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혁명의 시대" 따윈 없다. 모든 게 "놀이"였다." 물론 이런 코멘트는 "냉소주의"라고 비난 받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좌파와 우파가 만나서 화기애애하고, 진지하게 사상적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 이 토론의 본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근대를 초극한다는 것, 그 일점이 중요하다고 하.. 더보기
도쿄의 마라톤 붐 한국이 야구 열기로 들끓던 22일, 도쿄에서는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선수들만이 아닌 일반인도 달렸던 이 대회에서는 3만 5천명이 참가했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경쟁율이 7.5배를 넘었다고 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달릴 수만 있다면 10만엔이라도 기꺼이 내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며, 이 대회를 위한 법인을 설립하겠다는 도쿄 도지사의 말을 인용했다. 그 말 중에는, 추천 운이 없는 셀레브등을 위해 기부금에 의한 특별 자격을 마련하자는 구상도 있어서 관심을 끌었다. 돈으로 경험을 산다..... 그건 물론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돈의 목적이,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을 돈으로 살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때, 마라톤 역시 하나의 대상일 수 있겠다. 하지만 왜 하필 오늘날, 이런 극.. 더보기
미국인의 얼굴  어제 일본의 각 미디어들은 일제히 오사카의 도톤보리라는 개천에서 건진 한 인형에 주목했다. 이 인형은, KFC 가게 앞에 서 있는 샌더스 마네킹인데, 1985년 오사카의 한신 타이거즈가 리그 우승을 했을 때, 열광한 팬들이 개천에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오사카 한신 타이거즈는 24년간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는데, 좌절될 때마다 팬들은 "커넬 샌더스의 저주" 때문이라고 중얼거리곤 했단다. 따라서 오사카 사람들은 도톤보리에서 이 인형을 찾아냈다는 것을 곧 "커넬 샌더스의 저주" 가 풀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기뻐한다고. 이 기사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야구가 아니다. 물론 오사카 사람들이 왜 야구에 열광하는지, 혹은 열광은 어째서 징크스를 만들어내는지도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 더보기
누가 얼마 받는지를 알아야만 그 삶의 의미를 아는, 불쌍한 것들을 남기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신 후, 나는 몇 개의 기사를 뒤져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 학생들과 같이 읽었다. "서임"이라든지 "선종"이라든지 하는 어려운 단어가 있었음에 불구하고,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건희 전 삼성 회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이름만 기억해주길 바랬다. 무엇보다도 명동성당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일요일마다 친구들과 시를 읽으러 명동성당 카톨릭 회관으로 가곤 했는데, 어느 가을날 일요일에는 데모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나는 경찰들이 에워싼 명동성당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얼른 데모가 진압되어 친구들과 만나길 기다렸는데, 데모는 끝내 진압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알게.. 더보기
전향: 이론-원리중독자들의 작은 세계 표 (1) 전향에 대한 일반적 이해 표 (2) 전향에 대한 요시모토 타카아키의 이해 일반적으로 "전향"이라는 말은 사상이나 정치적 신념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본의 경우에 "전향"은, 1920-30년대, 국가 공권력의 탄압이란 외적 요인에 의해서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사회주의적 입장을 포기하게 된, 일련의 사건의 핵심 키워드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표1) 이런 문제로서의 "전향"은, 패전 후 일본의 지식인들이 왜 우리는 질수 밖에 없는 무모한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혹은 왜 일본인들은 전쟁을 막을 수 없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주목받게 된다. 즉, 한 인간의 사상적 자유가 왜, 그리고 어떤 식으로 포기되었는가-를 추적함으로써, 1920-45년까지의 일본사회의 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