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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미국인의 얼굴


어제 일본의 각 미디어들은 일제히 오사카의 도톤보리라는 개천에서 건진 한 인형에 주목했다.  

이 인형은, KFC 가게 앞에 서 있는 샌더스 마네킹인데, 1985년 오사카의 한신 타이거즈가 리그 우승을 했을 때, 열광한 팬들이 개천에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오사카 한신 타이거즈는 24년간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는데, 좌절될 때마다 팬들은 "커넬 샌더스의 저주" 때문이라고 중얼거리곤 했단다. 따라서 오사카 사람들은 도톤보리에서 이 인형을 찾아냈다는 것을 곧  "커넬 샌더스의 저주" 가 풀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기뻐한다고. 

이 기사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야구가 아니다. 물론 오사카 사람들이 왜 야구에 열광하는지, 혹은 열광은 어째서 징크스를 만들어내는지도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저 기사에서 내 관심은, 흥분한 군중들이 왜 하필 저 인간의 형상을 강에 집어던졌는가 하는 점에 있다.  

생각해보니, KFC라는 치킨집 앞에 이 점잖은 창업자의 동상을 세워놓은 것 자체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웹에서 좀 찾아보니, 커넬 샌더스는 후라이드 치킨으로 창업해 미 전역에 600개의 점포를 만들어놓긴 했지만, 이제 쉬려고 점포들의 프렌차이즈권을 브라운이라는 사람에게 팔아버렸는데, 이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커넬 샌더스의 얼굴을 상표로 하는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바람에, 졸지에 그의 얼굴이 KFC의 심볼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형적인 온화한 할아버지의 동상을 통한 마케팅 전략은, 그러나, 미국 전역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모양이고, 오히려 일본 같은 해외에서 "미국"을 상징하는 얼굴로서 먹힌 모양이다. 고도성장기의 일본 사람들은,  KFC의 이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미국식 음식인 후라이드치킨의 식욕을 상기한 모양인데, 이런 사실은, 어쩌면 미국은 언제나 그 자신을 강력한 그 누군가의 얼굴을 통해서 대리-표상시키려 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동상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사회주의나 전체주의 국가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동상은 그 사람의 존재감을 극대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얼굴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양식은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회주의나 전체주의를 생각할 때, 언제나 히틀러나 스탈린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건 우리가 바로, 무엇인가를 얘기할 때, 얼굴을 클로우즈업하는 미국의 퍼스퍽티브 속에 그 만큼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주의나 전체주의가 무너졌을 때, 그곳 사람들은 분명 스탈린과 후세인의 동상으로 갔다.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얼굴을 치워버리기 위해서 그곳에 갔지만, 그들이 치워버린 건 그들의 동상이지 얼굴은 아니었다.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얼굴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의미없는 동상을 치워야 했다. 자신들의 삶과 그 공간을, 늘 그 누군가의 얼굴을 통해서만 대리=표상하려는 이들의 시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근데, 리그 우승을 한 기쁨의 오사카의 군중들은 왜 커넬 샌더스에게 가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신문들은 그 이유를, 그가 한신 타이거스의 거포 용병인 랜디 바스와 닮은 유일한 조형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부연하자면, 오사카 야구 팬들은 한신이 우승하면 도톤보리에 빠지는 의식을 거행하곤 하는데, 그들은 그 기쁨을 랜디 바스와 함께 나누고 싶어했다고. 그 만큼 그 당시 한신에게 있어서 바스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는데, 그런 그를 강에 넣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서, 그와 닮은 커넬 샌더스가 선택되고 만 셈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들이 정말 한신의 얼굴인 바스와 기쁨을 나누고자 한 것인지, 아니면 한신의 얼굴로서의 미국인 얼굴을 치워버리고 싶었던 것인지 헷갈린다. 분명한 건, 1985년 한신 타이거즈가 리그 우승을 했을 때, 오사카의 군중들이 미국인의 얼굴을 찾아서 여기저기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녔다는 것, 그들은 모두 텔레비전을 통해서 그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KFC에 가면 그와 닮은 미국인의 얼굴(닮았다기보다는 던질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의 형상)이 있다는 걸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