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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1984년의 두 개의 달-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혹은 폭력과 사랑 디스토피아로서의 ‘1984’, 유토피아로서의 ‘1984’ 세계 문학에서 1984년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위대한 문학자의 출생과 죽음, 혹은 문학 작품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들에게 있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지나지 않는 1984년은 세계문학에서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혹은 도래해서는 안 될 미래의 대명사로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지하듯이 1949년 조지 오웰이 발표한 『1984』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운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유럽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조지 오웰은, 숨을 거두기 일 년 전 자신이 떠나가게 될 이 지구의 미래를 바라보며, 이를 ‘1984’이라는 숫자에 각인시킨 것이었다. 조지 오웰의 눈에 비친 1984년은 그리 낙관적이지는.. 더보기
실타래를 쥔 고양이처럼 세속화의 기관으로서의 놀이는 도처에서 쇠퇴하고 있다. 현대인이 더는 놀 줄 모른다는 것은 새로운 놀이와 기존의 놀이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증가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실제로 춤이나 파티같은 놀이에서 현대인은 자신이 거기에서 찾을 수도 있는 것(잃어버린 것의 축제에 다시 접근할가능성, 성스러운 것과 그 의례로의 회귀)과 정반대의 것을 필사적으로 집요하게 찾는다. 그것도 스펙터클한 신종종교나 시골 무도회장의 탱고 레슨에서와 같은 어리석은 의식의 형태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의게임쇼는 새로운 예배의식의 일부이다. 이런 게임쇼는 종교적 의도를 무의식적으로 환속한다. 놀이에 그 자체의 순전히세속적인 사명을 되돌려주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과제이다.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더보기
다원적 우주 브랑키 "천체에 의한 영원"으로부터 [인생의 갈림길에 직면한 적이 전혀 없는 인간이 정말로 있을까? 자신이 피한 길을 걸었다면, 개성은 그대로이면서도, 완전히 다른생활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한쪽은 빈곤, 치욕, 복종으로 통하는 길. 다른 한쪽은 명성이나 자유로 통하는 길이다. 이쪽에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행복이. 다른 쪽에는 사나운 여자와 황폐. 내가 말하고 있는 건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적용된다. 우연에 맡기든, 선택을 하든 똑같은 것으로, 숙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숙명은, 영원 속에서는 입각할 수 없다. 영원은 양자택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지구에서 인간이 걸어온 길을, 다른 지구에서는 그의 분신은 걸어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의 생활은 두 가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