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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매개로서의 화폐가 붕괴될 때

이마무라 히토시, 『화폐 인문학-괴테에서 데리다까지』

 

지난 10년 동안 데리다와 바디우, 지젝 등의 정의에 관한 저작들이 차례차례 소개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한국의 출판 시장에서,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륙 쪽 사상을 배경으로 쓰여진 정의론과 달리 영미 쪽 사상을 배경으로 쓰여진 샌델의 정의, 정의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화폐를 끌어온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물론 화폐를 통해서 정의를 얘기하는 이런 지적 작업들은 지나치게 경제론적 관점에서 정의를 보기 때문에, 화폐가 그 자체로서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인간의 삶을 혼탁하게 만들기에 폐기되어야 한다는 관점과 정면으로 대치한다. 실제로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플라톤부터 현대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그들의 이념에 비추어 화폐를 혐오하고 비판하고 무시했다. 화폐에 대한 비판은 자본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비판인 양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현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이마무라 히토시의 『화폐 인문학-괴테에서 데리다까지』에 의하면 화폐는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특징이다. 그는 화폐를 변호한 지멜의 화폐론을 근거로 인간이 복수의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숙명적·근원적 사실이라면 타인과의 상호 교통 또한 숙명적인 것이며, 따라서 교환 가능성의 조건이자 교환의 결정화인 화폐 또한 인간에게 숙명적이며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마무라의 주장에 따른다면 오늘날 정의가 화폐를 통해서 이야기되는 것도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물론 『화폐 인문학-괴테에서 데리다까지』에서 이마무라가 교환 가치로서 화폐의 교환 가능성을 그저 낙관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마무라가 괴테의 『친화력』을 교환 가치로서 화폐의 본질을 보여주는 텍스트로 읽을 때, 그는 화폐가 휘브리스의 죄와, 죄 없는 희생양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샤로테와 에두아르트는 매개로서 화폐의 힘을 과신해 국가를 마치 하나의 공장으로 바꾸기를 이상으로 삼고 근면의 윤리를 제창하면서 자연을 개조해 기술자 중심의 산업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던생시몽주의자처럼, 자신의 영지를 미적으로 훌륭한 정원으로 꾸미기 위해서 늪이나 무덤 같은 자연을 침범할 뿐만 아니라, 시민적 윤리마저 침범하며, 결국 오틸리에의 죽음을 낳는다. 이처럼 화폐 같은, 인간 관계의 매개로서 제도는 소설의 사건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존재다. 하지만 이마무라는 이런 비극이 화폐라는 매개 형식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제도적 매개 형식으로서의 화폐가 흔들림에 의해서, 매개자에 의해 억제된 마성적인 것이 출현해, 차이와 경계를 지닌 사회 관계는 다시 혼돈으로 추락하는 사건으로 파악한다.


매개로서의 화폐 그 자체의 성격보다는 화폐가 지닌 매개적 가치가 붕괴하는 문학적 상상력에 초점을 맞추는 이마무라의 관점은 지드의 『위폐범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악화가 양화를 낳는다는 그레셤 법칙을 적용하려는 듯 진짜와 가짜가 끊임없이 전도되어 마침내 최종 심급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게 되는 내용을 담은 이 소설이, 문학사조적으로는 리얼리즘 문학의 위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이마무라는 이 소설을 사회 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질서의 원점이 되는 일반 등가 형태의 붕괴 현상, 혹은 문화 가치로서의 금본위제가 붕괴하는 현상과 더불어 이해하며, 그런 의미에서『위폐범들』은 관계 매개자로서의 일반 등가, 즉 화폐 형식의 붕괴를 내다본 소설로 파악된다.


하지만 지드가 보여준 화폐 형식의 붕괴는 화폐가 지닌 일반 등가라는 형식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에 의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플라톤과 루소,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 화폐는 실물 경제를 도구적으로는 대리하는 불투명한 도구로 인식되어왔으며, 그것이 화폐 폐지론으로 이어진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이마무라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마무라는 왜 이토록 매개로서의 화폐를 옹호하는 것일까?


그것은 근대가 매개의 불투명성을 자각해 투명하고 직접적인 교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큰 폭력을 낳았다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즉 레닌=스탈린주의와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은 인간 관계 안에 매개 형식을 둠으로써 직접적인 폭력적 충돌을 회피한다는 실천적 지혜의 의미를 통찰하지 않는, 계획과 통제를 논한 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시민 생활 안에 있는 매개 형식을 철폐함으로써 인간 집단을 직접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이마무라는 지적한다. 화폐를 단순히 물질적인 것으로 쉽게 처리한다면 화폐 폐기 실험은 사람만 죽일 뿐이라고.


이런 인식은, 이마무라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데리다가 문자(에트리튀르)에 한정해서 말한 것을 화폐를 포함한 매개 일반으로 넓혀서 파악한 것이며, 그런 인식으로 봤을 때 전체주의는 매개를 기피하고 무매개를 이상으로삼은 역사적 실험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이마무라의 지적대로 전체주의가 화폐, 언어, 논리, 법 같은 인간의 매개를 완전히 파괴했다고 볼 수는 없다. 전체주의가 직접적인 것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 같은 매개 형식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아감벤 등의 지적을 통해서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가 유독 화폐를 강하게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했다는 점은 놓쳐서는 곤란한 중요한 사실이다. 이마무라의 말대로 화폐의 형식 속에 죽음의 관념이 내재화되어 있다면 그들이 경멸한 것은 실은 죽음 관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전체주의는 화폐의 증여라는 형식으로 가까스로 교환될 수 있는 죽음의 가치를 무시한 공동체의 형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죽음도 화폐로 교환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죽음이나 희생에 대해서 국가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청구할 때, 우리는 그 죽음의 가치를 단순히 산술적으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니고, 화폐의 형식으로 정의를 얘기하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폐 형식을 통해 정의를 묻는 행위는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삶의 형식인 셈이다. 




물론 모든 영역에서 화폐 형식을 매개로 우리의 가치들이 교환되는 것은 피곤하고 권태로우며 심지어 폭력적이기조차 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삶의 형식을 포기할 때, 무덤조차 없는 죽음들이 즐비한 세계의 폭력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이마무라의 증언은, 지금 여기에 있는 화폐 형식을 통해서 해야 할 일 쪽으로 우리의 관심을 다시 모우는 중요한 동력임에 틀림없다.

 

 자음과 모음, 2011.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