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영상에서 난감한 말의 현실로의 정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베 카즈시게『그랜드 피날레』(고단샤, 2005년)
 
  최근 10년간 이 세계에 일어난 두드러진 변화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변화 속에서도 ‘IT 혁명’이라 불리워지는 테크롤로지 변화만한 것은 없으리라. 1995년 윈도우 95 출현을 계기로 시작된 이 변화는, 문자정보의 데이터화를 거쳐, 이제는 영상을 스톡하고, 문자의 개입없이 영상을 그 자체로 검색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즉, 영상-이미지에 의한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믿는 세계가 도래하려고 한다.

이런 변화에 대해서, 한국 문학은 아주 일찍부터 ‘문자의 패배’를 예감하고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포즈를 보였다. 장정일이 “너에게 나를 보낸다” 후기에서 영상매체에 의한 서사의 무력함을 내뱉은 것은 IT 혁명 이전-그러니까 한국에 MTV와 스타채널이 일반화되던 시기-었지만, 영상매체의 선명한 가시성이 주는 충격은 말을 다루는 작가에게는 보통 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장정일의 지적대로, 95년 이후 한국문학이 갖는 사회적 지배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시인-소설가의 감독으로의 전향이, 마치 역사적 필연처럼 받아들여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던가?

『그랜드 피날레』라는 단편으로, 2005년 2월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아베 카즈시게(阿部和重)를 보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주↓) 그는 1996년 영화로부터 멀어져 소설로 빠져들어가는 영화학교 학생의 삶을 그린『미국의 밤』이라는 장편소설로 군상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최근 십년간 가장 주목받는 일본의 젊은 소설가 중 하나인데, 소설 속의 이력은 그의 실제 커리어와 일치하기도 한다. 동소설에서 그는, 그런 반동(反動)적 이력에 대해서, 한편의 영화를 완성시키고 유통시키는 것은 영상이라 아니라 말들-보다 엄밀히 말하면 말의 정치성-이라는 깨달으면서 ‘돈키호테’같은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냉철한 철학적 인식론적 필터에 넣고 돌리면 금방 얻을 수 있는 매우 단순하고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기업과 국가와 아카데미의 합종연행으로 동화상이 문자를 대체할 것이라고 몰아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봤을 때는, 현실의 지평에 탄탄히 발을 딛은 하나의 문제 제기로 볼수 있으리라. 그러한 문제제기는 몇편의 소설을 통해 심화되어, 아쿠타가와 수상작『그랜드 피날레』를 통해 하나의 결실을 맺는다.

롤리타 컴플렉스와, 그러한 욕망을 해결하고 지속시킬수 있도록 해주는 IT 기술의 발달로 인해, 결국은 아내와 이혼당하고 자신의 욕망의 대상인 딸에게로의 접근도 금지당해 파멸로 치닫는 서른일곱살의 남자 주인공을 내세운 이 소설에서, 아베 카즈시게의 문제 의식은 다음과 같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일반화된 21세기의 오늘날에서조차, 오래된 성에 유폐되어 있는 공주님과의 재회는 매우 곤란하다. 손가락 하나 건드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딸과의 먼 거리를 재인식하게 된 나에게, 반도체기술은 더이상 어떤 도움도 되어주지 못하고, 아동복시장은 지옥의 가마솥 밑바닥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양눈이 파열할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주인공에게는 “또 하나의 가족”같은 이념을 이상화해온 기업의 기술적 서비스가, 솔루션은커녕 가족 파괴의 심적외상의 계기며, 증폭의 기재로 작용한 셈이다.

작가는 디지털 미디어의 ‘정보’의 대량화 문제의 핵심도 놓치지 않고 있다. 즉, 인터넷 정보는 한 개인이 겪는 심적외상과 윤리의 문제를 해결보다는 허공에 띄우는 역할도 한다는 것인데, 일테면 일본의 롤리타 컴플렉스에 의한 소녀학대나 동영상 제작이, 넷을 통해 떠다니는 우간다의 소녀들이 겪는 삶과 대비되는 대목이 그렇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강간당한다는 것과 그리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간다 소녀들에 대한 ‘정보’ 는, 롤리타 컴플렉스와 아동학대금지법이 그저 1세계 안에서만 강한 의미를 지닐뿐이라는 것을 시사하면서, 무거운 논의를 가벼운 것으로 띄워버리거나, 아예 그러한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결국 디지털 미디어에 욕망을 내주고 파멸을 맞이해, 두번다시 자신의 딸을 보지도 못하고 편지조차 전해주지 못하게 된 소설속 주인공은, 추운 동북지방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유폐생활을 시작하는데, 그 때 두 명의 소녀를 만난다. 주인공은 이 천진난만한 두명의 소녀들을 통해 롤리타 컴플렉스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되지만, 바로 그 때 그는 두 소녀들이 둘만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인터넷의 자살사이트를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온갖 욕동과 그에 의해 힘을 받는 생을 긍정하는 디지털 미디어가 죽음마저 손에 넣으리라는 것은, 이야기가 등에 업고 있는 메타담론의 논리상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이 때 주인공이 도달한 어떤 확실한 현실이다. 즉, 그 현실이란, 디지털 미디어의 외부에서 “말만을 사용해서 현실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난감한 장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장소에서 과연 어떤 말로 소녀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지 작가는 말해주지 않는다. 과연 정말로 말로 그것이 가능한지도. 하지만 말을 통해 겨우 발견한, 말 이외에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결정적인 삶의 한 장소에 가능한한 오래 정박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문학이 삶에게 해줄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닐까? 분명한 건, 그것이 아프리카의 영상이 나오면 가볍게 채널을 돌리거나, 문학의 죽음을 얘기하며 수선을 피우고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나, 혹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겠다는 거절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보다는 힘든 일이라는 것뿐이겠지만. ★


주) 아베 카즈시게의 존재는, 영화연구에서 문학연구로, 문학연구에서 소설가로 이동해온 마츠우라 히사키 같은 선구자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고다르와 히츠콕에 대한 양질의 연구를 계속해온 마츠우라 히사키 교수는, 영화를 통해서 영화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해,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슬적 토스하곤 하는데, 아베 카즈시게는 그러한 가르침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연세대학원 신문, 2006년 5월 8일,  걸리버의 시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