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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 일본

진짜 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그럴싸하게 역할을 수행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온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어떤 역할의 가장 이상적인 수행자란, 어떤 경우에도 돌출하지 않고 아주 몰개성적으로 그 역할의 전형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모든 점에서 나는 평범한 인간이었고, 또 평범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꽤 유능했으며, 더욱이 동료들에게 미움을 사는 일 따위는 한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불만스러웠다. 나는, 진짜 나는 훨씬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고, 언젠가 그것이 나타나기를 꿈꾸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 신은주 변역, 최후의 변신, 2004→2008



카프카의 "변신"을 해석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이 소설은, 그런 형식이나 해석 그 자체에 있어서 그리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작품이다.

하이데거가 인간과 인간의 만든 세계에는  "도구적-기능적-역할적" 성격이 뿌리깊게 내재화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토마스 만이 "예술가적 삶"을 제시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카프카에 대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해석은 실로 지루하기 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레고리 잠자의 변신이, 기능적인 인간에서 본연의 인간으로의 전환이라는 그의 해석은, 그리 특별할 게 없다.

특별한 거라면, 히라노가, 변신을 세대론과 결부시켜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 그는 일본에서의 그의 세대의 정체성을, 역할과 진짜 나와의 대립구도로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  이를테면;

   
우리 세대 인간들은 그후,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아
이들'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표변하여 '흉악 범죄자'가 된다! 특히 학
교는 책임을 떠맡는 게 싫어서(원래부터 요주의 학생이었다는
식의 말을 했다가는 곧 예방 책임 방기에 대한 추궁을 당할 테니
까), 바로 이거라는 듯이 그 표현에 달라붙었다. - 그러나 그것
은 주객이 전도된 표현이었다. 표변이 범죄를 가능케 한 것이 아
니다. 범죄야말로 - 그리고 오직 범죄만이 표변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아아, 우리를 이 끝없이 계속되는 일상으로부터 탈출시켜주는
변신!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기 위한 변신! 때때로 그것은 전
혀 반대의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결국 잠깐 동안의 탈출에 지나
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의 인간은 탐닉하듯 그
일에 덤벼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원봉사 같은 것이다.


일본에서 한 인간을 어떤 세대에 속해 있는가로 판단하려는 경향은, 1960년대에 강했고, 그 이후 약해졌다가 2000년 전후 해서 다시 강해졌다. 전자가 전쟁을 경험한 자들(전전, 전중파)과,  경험하지 못한 자들(전후파)의 대립이었다면, 후자는 80년대의 버블을 경험한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의 대립인데, 전자가 빈곤을 경험했는가의 문제라면, 후자는 풍요를 경험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히라노는 후자를 대리-표상하려고 한다. 즉, 태어나서 한번도 압도적인 풍요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는, 기능-도구-역할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 전전긍긍해하면서 어떻게든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게 진짜 나는 아니라는 의구심에 늘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리고 그런 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 세대의 방식이, 히키코모리와 블로그, 그리고 범죄는 아닐까 하고.

그런 히라노의 행위는, 세대를 등에 업는다는 점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문학의 한 "역할"을 떠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으리라. 혹은 역사적 단절의 수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 스스로를 어떻게든 역사 속에 위치시키기 위한, 처절한 방법론적 모색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그렇게 볼 때, "역할" 속에 회수되지 않는 "진짜 나"를 찾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는 어떻게 된 것인지 묻게 된다. 그건 단지 미끼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하고.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과연 카프카의 "변신"이 그레고리 잠자의 "진짜 나"를 문제로 한 건지, 나로서는 의심스러우니까. "진짜 나"는, 100년이 넘도록 일본문학이 탐구한 문제였다는 점에서,  여전히 일본 독자들에게 훌륭한 미끼는 아니었을까?

그런 오래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여전히 "나"를 설명하는데 미숙하고,  그래서인지 "진짜 나"를 찾는 소설은 꾸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