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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 일본

게임적 문학의 시도 : 리셋 가능한 생(生)의 가능성




☞ 순문학의 독자가 다양한 계급이나 연령에 걸쳐있다고 하는 것은, 순문학이 현실을 그리고 있다고 하는 기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그러한 기대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을 둘러싼 보도 기사이다. 그들 기사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소설의 내용이 사회문제와 결부되어 말해진다. 미스테리나 호러는 오락을 위해서 읽지만, 순문학은 오락이 아니라, 사회를 알기 위한(예를 들면 NEET나 재일 한국인의 현재나, 독신 여성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교양으로서 읽는다고 하는 전제가, 일본에서는 반년마다 재강화된다.

 ☞ 1995년 이후, 필자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동물의 시대"라고 부른 시대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복잡한 이상이나 허구가 아닌, 단순한 현실을 찾기 시작했고, 순문학은, 문학적 실험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소박한 욕망의 하수구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 캐릭터 소설의 문학적 가능성은, 현실을 자연주의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애당초 무리지만), 투명한 말을 사용하면 사라져 버릴 듯한 현실을 발견해, 그것을 말의 반투명성을 이용해서 비일상적인 상상력 위에 산란시키는 것으로 구워내는 듯한, 굴절된 과정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닐까?

☞ 캐릭터 소설을 포함한 오타쿠들의 시장은, 상상력의 환경으로서 캐릭터의 데이터 베이스를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원작의 성격이나 원작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온갖 이야기를 언제나 "단 하나의 종말을 향해서 가지 않는" 것으로서 독해하고 소비할 수가 있다. 

☞ 게임적 리얼리즘은, 포스트모던이 확장한 이야기 소비그 확산이 낳은 구조의 메타 이야기성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그 표현은 만화/애니메적 리얼리즘의 구성요소(캐릭터)가 낳는 것이면서, 이야기를 복수화해, 캐릭터의 생을 복수화하고, 죽음을 리셋 가능한 것으로 해버리기 때문에, 만화/애니메적 리얼리즘의 중심적인 과제, 즉 "캐릭터에 피를 통하게 하는 것의 의미"를 해체시켜버린다. 

☞ 2000년대 중반의 일본에서는, 이야기적 상상력은 자연주의적 기초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데이터 베이스의 융성과 커뮤니케이션 지향 미디어의 대두라는 두 가지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끊임없이 메타 이야기적 상상력에 침식되고 위협을 받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2007 





아즈마 히로키는, 일본에 있어서 글쓰기의 두 가지 지향성 중, 사실-현실보다는 표현 그 자체 쪽에 무게를 두는 계보 속에 속하는, 가장 젊은 사상가다.

"포스트모던" 이후, 그러니까 거대담론이 붕괴했다고 하기보다는, 푸코나 들뢰즈라는 파워 담론이 세워진 이후, 사실-현실보다는 표현-담론-시뮬라르크 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의 말처럼, 문학은 여전히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나 "국가"를 알기 위한 교양으로서 읽혀지는 경향이 강하다. 아니 오히려 사회학이나 역사학 쪽에서 문학 텍스트를 일종의 "사료"로서 끌어들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경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근데 그런 사회과학 쪽의 요청에 문학이 응할 때, 문학의 위상은 과연 높아진 것일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전혀 아닐 수 있다.  문학이 무엇인가의 시녀가 되어가고 있는 "오늘날"들을, 얼마나 많은 작가-이론가들이 경고하고 개탄했는지는,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인 이슈를 찾아서 발굴하거나, 글쓰기에 의한 사회적 펄스효과를 거의 염두에 두지 않고 쓰여지는 "라이트 노벨(가벼운 소설)", 혹은 만화-애니메에 주목해, 이론화를 시도하고 있는 아즈마의 작업이 갖는 의의는 충분하다.  특히 특정 캐릭터가 특정 이야기 속에서만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의 이야기의 바깥으로 뛰쳐나가 복수의 이야기들을 창출해가는 과정이, 단 한번뿐인 사건으로서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해체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아즈마에 의하면, 캐릭터와 이야기의 분리의 경향은, 언제나 리셋(다시 출발함)할 수 있는 게임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즉, 오타쿠들은 이야기와 분리할 수 없는 캐릭터를 꺼내서, 게임의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다. 일테면 엑스파일의 멀더를 그대로 빼내서 식스 앤 시티에 집어넣는 식으로. 

하지만 언제나 다시 출발할 수 있거나, 복수의 삶을 살수 있는 게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단 하나의 삶과 죽음 밖에 경험할 수 없는 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행위이기에 문제적이다. 위험하지 않고 문제적이라고 쓴 것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복수의 삷의 가능성을 늘 염두해둔 철학자들의 구상을, 삶의 차원에 있어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삶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리얼리티가 없기 때문에 배제된 삶을 "리얼"로서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정말 아즈마의 말대로, 현실을 정밀하게 반영하려는 자세를 방기하고, 표현 그 자체를 지향하는 것에 힘을 실어줘도 괜찮은 것일까?  사실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있는 텍스트는, 아즈마가 비판하려고 하는 아쿠타가와상을 받는 "순문학"이 아니라, "지금-여기"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거리를 둔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 같은 아닐까?  (아님, "꽃보다 남자" 같은.)   

.......이런 의문을 불식시키려는 듯한 사건이 일어났다.  작년에 일어났던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인 사건. 그 사건은, 현실과는 완벽하게 유리된 듯이 여겨졌던 가상 공간 속의 표현들이, 현실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 아즈마에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아즈마도 "현실"을 얘기하는 미디어에 등장해 사건을 해설하는 역에 동참하게 되었고, 나도 티비를 통해서 본 적이 있다.

그는 리얼과 생에 관한 인식을 둘러싼 상황이 변했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말이 가지고 있는 논리성은 스무살의 나이에 무참히 죽은 한 여자의 단 한 번뿐인 삶의 종언을 이해시키기-라기보다는 위로하기엔 턱 없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공간에서 벌어진 일의 규명에 책임을 지려고 나섰다는 점은, 보기 좋았다.    

아무튼 나로서는, 다른 방향을 향해 치달리던 지향성이 어느날 크로스할 때, 그 때 우리 앞에 와닿는 "리얼"의 불투명함 속에, 문학의 한 가능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