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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 앙큼한 고양이의 매력, 혹은 소설 쓰기의 현장


100년 넘도록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나쓰메 소세끼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인 吾輩である(1905~6), 서은혜에 의해 이 몸은 고양이야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해방 이후만 하더라도 이 원작은 1962년 김성환에 의해 나는 고양이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래 나는 고양이로다(최을림 역, 중앙출판사, 199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유유정, 문학사상사, 1997) 등으로 번역되어 왔지만[각주:1], ‘이 몸으로 번역한 것은 획기적인 시도로,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 번역자의 해설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번역 의도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일단 이 번역이 고양이 화자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칭대명사 로 환원해온 경향에 대해 반성케 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서은혜의 번역은, 기존의 번역이 소세끼가 고양이를 지칭함에 있어 ,,등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반적인 1인칭대명사를 의도적으로 회피했다는 점, 그리고 그 선택지로서 吾輩라는, 이미 이십여 년 전에 발표된 쓰보우치 쇼요(坪内逍遥)당세서생기질(当世書生気質, 1885~6)에서나 볼 수 있는 인칭대명사를 선택했다는 점, 나아가 이를 가능케 하는 다양한 1인칭 대명사를 보유한 일본어 시스템의 특징 그 자체를 누락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몸이라는 번역어가 이러한 번역상의 난점을 모두 해결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몸으로 바꾼다고 인칭대명사를 둘러싼 일본어의 특징이 고스란히 한국어 속에 기재될 만무할 테니까. 그럼에도 새로운 번역은 이 몸이라는 말을 통해 근대성의 시발점이 되는 의 자명성을 소세끼가 유보하려 했음을,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를 굳이 고양이라는 동물의 의 시선을 빌려서 보고자 했던 노력의 흔적을 가능한 살리려고 했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건 서구적 의미의 인간속에 자신들을 투영하고자 했던 당시의 일본인들을 비판하기 위한 거리를, 어떻게든 확보하고자 한 작가의 노력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이 번역이 다른 번역들보다 더 원문에 충실하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서은혜 번역은 문단 나누기에 있어 가독성을 중시한 송태욱 번역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과는 달리 원문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번역은 다른 번역과는 달리 원문에 대한 번역자의 해석이 매우 강하게 관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건 바로 소세끼 문체의 일관적인 특징 중인 하나인 종결어미 である, ‘이다가 아닌 이야’(혹은 이고’)라는 어미로 번역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예컨대 현대 일본어 문맥에서 である‘XYである’(XY이다)와 같은 수학적 명제 등에 쓰일 만큼, 확정적이고 단호한 문어체이다. 다름 아닌 고양이가 그러한 문어체를 통해 인간들이 내뱉는 일상어를 인용하고 해석하는 데에 원작의 형식적 미학이 있다. 서은혜의 번역은 고양이의 말을 이야라는 구어체로 바꿈으로써 원문 속의 문어체와 구어체의 전도된 긴장관계를 살리지 못한 점은 분명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과감하게 である를 버린 대신, 서은혜 번역본은 ‘~’, ‘~’, ‘~/등 다수의 한국어 종결어미를 자유롭게 사용해 문단 나눔 없이 2~3 페이지 줄기차게 이어지는 사고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도, 가독성 높이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감칠맛 나게 이어지는 고양이의 말을 쫓다보면, 마치 이 고양이가 소세끼라는 작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 있는 캐릭터로 독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새로운 번역은, 독자들로 하여금 날카로운 비평정신을 가진 완고한 근대 일본 지식인 소세끼보다도, 그 옆에서 그를 관조하는 이 이름은 아직 없는 고양이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제까지 이 작품은, 소설로서의 작품성 그 자체보다는 소세끼라는 지식인의 프레임을 통해 본 당시 일본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읽혀지는 경향이 강했다. 그 때 고양이는 러일전쟁 직후의 일본인의 생활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일본 지식인의 시선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서 간주될 뿐이었다. 실제로 1993년도판 이와나미 소세끼 전집은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568개의 주석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소오세끼 작품이 하나의 역사적 자료이자, 동시대 역사를 매개하는 미디어로서 읽혀졌음을 의미한다. 김태원의 지적대로 번역이 수세기 동안 축적된 독서경험의 역사 혹은 지적 전통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의식한다면[각주:2], 한국의 다른 소세끼 번역들과 마찬가지로 간략한 용어해설 정도로 주석을 처리하는 것으로 독서 경험의 역사를 갈무리하는 이 몸은 고양이야또한, 소세끼 전문가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서은혜의 번역은 그러한 문학연구자들에게 이 텍스트가 역사적 자료 이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소설임을 환기시켜주고자 한다. , 나긋나긋한 문체로 전개되는 고양이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당시의 시대상 이전에 인간의 타자로서 인간세계를 조망하는, 이 앙큼하고 요물같은 고양이의 존재 그 자체에 자신도 모르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라고.



물론 이름은 없다고 말하는 고양이는 분명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타자를 인간의 언어로 구성한다고 하는, 이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 바로 소설쓰기이며, 이에 소세끼가 매료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직 학문의 세계 안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며 전전긍긍하던 소세끼가 고양이-쓰기를 통해서 행을 나눌 겨를조차 없이 소설의 세계 속으로 깊숙하게 빨려들어 가는 현장, 그리고 이에 당시의 독자들이 폭발적으로 열광하던 현장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가능토록 만드는 고양이가 조금 거만하게 이 몸은 고양이야라고 한다고 뭐라 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



창작과비평 제45권 제1호 (통권 제175호), 2017.3, 


  1. 윤상인, 김근성, 강우원용, 이한정 『일본문학 번역 60년 현황과 분석』, 소명출판, 2008. 188쪽. [본문으로]
  2. 김태원 「명작의 새번역 :온고지신의 미덕」 『계간창작과비평』174. 579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