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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국가의 위기와 인문학적 상상력

 

 

 

우치다 타츠루 길거리의 전쟁론, 미시마사,2014(内田樹,街場戦争論ミシマ,2014)

 

 

국가의 위기라는 새로운 과제

 

오늘날 인문학은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문학자들의 당연한 사명처럼 인식되어온 국민국가론 비판이 수그러들고,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글이 다수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는 많은 지식인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지난 이십여 년간 세계적으로 진행된 글로벌화로 인해 국가의 역할이 눈에 띄게 축소되면서 사회보장의 축소로 대표되는 국민들의 피해가 표면화되고 있는 상황에 기인한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에 국가가 어떤 위기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장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일이 몇 차례 거듭되었다. 동아시아만 놓고 보더라도 일본에서는 2011311일 동일본대진재와 연이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한국에서는 2014416일 세월호 침몰 사고를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사고들은 과거 수십 년 동안 누적된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표출된 비극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사고의 사후처리 과정 속에서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혹은 더 큰 사고가 반복되지 않으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징후적이다. 국가가 이러한 대규모의 사건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수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노출시킴으로써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지고 있다.

 

이렇게 국가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황 속에서 인문학은 그동안 국가를 대상으로 전개해왔던 비판을 잠시 멈추고, 국가가 마땅히 해야할 일에 대해서 되묻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당연히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국가의 모습을 사람들이 망각하거나 애써 외면하려 해왔다는 자각과 반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바라는 국가의 모습은 무엇이며, 국가의 위기 속에서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에 소개하는 우치다 타츠루의 길거리의 전쟁론은 이런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시의성이 있는 책이다. 1950년생으로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현대 철학을 대학에서 가르쳐온 우치다의 저서는 이미 한국에 여러 권 번역된 바 있다. 난해다고 여겨지는 레비나스의 사상을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알게 쉽게 해제한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갈라파고스, 2013)이 대중화를 지향하는 학술적 저서라면, 하류지향(민들레, 2013)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메멘토, 2014)은 중요한 동시대적 문제를 발 빠르게 대처한 책으로 동시대 일본 독자들-특히 젊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가라타니 고진과 사카이 나오키가 구미권에서 이미 통용되는 학술적 언어로만 사유를 개진함으로써 논리적 엄밀성을 추구한다면, 합기도 7단으로 자신의 집 일층에 개풍관이라는 도장을 열어 무도 수련과 더불어 철학 강의도 하면서 새로운 학습공동체 모델을 만들고 있는 우치다는, 그 특이한 경력이 말해주듯 굳이 학술적 개념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언어와 상상력으로 실천적인 사유를 전개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2014년 하반기에 출간된 길거리의 전쟁론또한 그 스스로 이 책에 굳이 부제를 단다면 상상력 사용법이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학술적 엄밀함을 결여하고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국가의 위기를 진단하고 돌파해나가는 데 있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주식회사가 되려하는 국가

 

그렇다면 우치다에게 오늘날 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그에게 있어 국가, 특히 일본국의 위기는 곧 국가의 주식회사화(株式會社化)’로 집약된다. 실제로 오늘날 적지 않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회사의 CEO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에 대해 국민들도 특별한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거대하지만 비효율적이라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국가에 메스를 들이댈 필요가 있다는 점에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에 힘입어 국가의 공기업들이 민영화되었고, 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의 혁신이 어째서 국가의 주식회사화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어째서 국가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우치다가 보기엔 주식회사의 문제는 가능한 코스트를 외부화하는 것이 본성이라는 점에 있다. 여기서 코스트의 외부화본래 자신이 부담해야할 경비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주식회사는 도로나 항만, 통신, 자연환경 등의 거버넌스와 사원의 기초적인 교육에 소요되는 경비를 다른 기업과 국가에게 전가한다. 물론 20세기의 주식회사는 자신의 이익의 일부를 국가에 지불함으로써 그 책임을 다해왔는데, 21세기의 주식회사는 법인세가 낮거나 거의 없는 국가를 찾아 이동하거나, 그렇게 할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국가에 법인세 인하 압력을 넣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우치다가 이러한 주식회사의 '본성'을 비윤리적이라고 비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식회사는 그것이 실패했을 때, 그 책임을 일정 부분을 제한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창업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이다. 이러한 주식회사라는 제도의 속성으로 인해 오늘도 많은 회사들이 만들어지고, 동시에 쉽게 파산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국가마저 코스트를 줄이기 위해 스스로의 책임을 외부화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치다가 국민국가는 무한책임조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 역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국가의 책임이 무한하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일본국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사고 책임을 도쿄전력에게 돌렸고, 한국은 세월호 침몰의 책임을 선장과 선박회사로 돌렸다. 국가가 그 책임을 인정할 경우 국가가 감당해야할 막대한 배상금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고스란히 국민들의 혈세로 돌아올 것을 고려한다면, 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치다의 주장은 만약이라는 상상력에 근거한 윤리적 요청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국가가 그 책임을 민간 기업에 돌릴 때, 실은 책임의 주체가 소실되고 마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즉 오늘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이 전력회사의 사장이나 선장 일 개인에게만 국한된다고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국민들이 스스로의 권리의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국가를 승인하고, 요청하는 것은 바로 일 개인이 감당하기 너무 힘든 책임의 몫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닐까.

 

국가의 무한책임은 곧 사회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우치다의 주장은 국가가 가진 폭력성에 주목하고 내셔널리즘을 비판해왔던 기존의 학술적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위험하게 비춰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주장은 전후 새롭게 탄생한 일본국이 찬란했던제국일본의 유산을 모조리 부인하려고 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분명 내셔널리즘을 긍정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제국일본을 계승한다는 것은 전쟁책임과 식민지 책임을 지기 위해서 불가피한 수순이다. 왜냐하면 그가 전승국과 구식민지로부터 이제 더 이상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가 제국일본의 후계자임을 자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내셔널리즘은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지난 십년 동안 거의 관례처럼 행해지던 내셔널리즘 비판이야말로 그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의 관점에서 국가를 바라보는 신자유주의의 확대에 기여한 측면이 적지 않다.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 책임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정치인의 등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고이즈미와 아베 신조는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어떠한 부정적인 유산도 상속받기를 거부하고 그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를 주식회사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우치다는 비판한다.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자 의식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을 구할 수 있는가

 

세상을 주식회사의 관점으로 바라보길 종용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은 과거 일본제국의 책임을 계승하길 거부하는 현재의 정치인들과 관료로 한정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우치다는 최근 일본의 젊은이들이 지()를 전수받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제자가 아닌, 스스로 자신이 얻을 지식을 결정하는 소비자로 전락해버렸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소비자란, 단순히 매사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기대하는 자가 아니라, ‘잘 모르는 것(상품가치)을 앞에 두면 오히려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그것을 잘 아는 척을 하는 권리를 손에 넣는 자로 정의된다. 특히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서 사후적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완전히 컨트롤 해야 한다고 믿는 소비자 의식이 교육에 있어서도 통용될 때, 이는 역설적으로도 스스로의 무지와 무능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개시되어야 하는 앎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고 그는 지적한다.

 

우치다가 바라보는 일본 교육계의 문제는 오늘날 한국에서는 더욱 노골적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되는 사교육은 학생들에게 교육이 일종의 소비행위인 것 같은 인식을 당연시하도록 만들었고, 이러한 인식은 대학에서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참고서도 없이 펼치지는 불가해한 세계를 그 존재 자체로 표상하는 텍스트와 어떻게든 대면하려고 결의하는 대신, 소비자로서 스펙을 얻는 길을 택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주식회사 이외의 다른 공동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대학이 주식회사의 예비단계, 혹은 매개가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우치다의 관점을 따른다면, 이 역시 본래 사원을 교육해야할 주식회사의 코스트를 대학이 대신 지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학이 이 세계의 주식회사화를 공고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이익 증대를 위해 코스트를 외부화하는 기업의 논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책임에 대한 의식이 실종된 주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이러한 소비자 의식을 가진 채로 사회로 나간 젊은이들이 정작 눈앞에 벌어질 컨트롤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하는 점이다. 우치다가 지적한 대로 오늘날 주식회사의 평균수명이 한 개인의 수명에도 미치지 않는 상황을 감안해본다면, 위기 대처 능력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스펙이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가와 개인에게 요청되는 위기 대처 능력은 과연 무엇인가. 대학은, 그리고 인문학은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이 책에서 우치다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는 것은 서두에 언급한 바 있는데, 그 상상력이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그곳에 없는 것을 생생하게 상상하고 (언어로) 현전시키는 능력이다.

 

제군, 우리들은 지금 해변에서 죽어가고 있다. 육지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죽지 않겠는가.

(Gentlemen, we are being killed on the beaches. Let us go inland and be killed.)

 

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죽은 인간과 이제부터 죽는 인간. , 이곳에서 제발 빠져나가자.

(There are two kinds of people who are staying on this beach : those who are dead and those who are going to die. Now let’s got the hell out of here)

 

위의 말은 모두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지휘를 했던 두 장교의 입에서 나온 말로 알려져 있는데, 우치다는 그들이 똑같이 이 짧은 발화 안에 여기에 있는 것’(죽음)여기에 없는 것’(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맞이할 죽음)을 나누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 순간 여기가 어떠한 곳인지를 파악함과 동시에, 그들이 서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여기에는 없는 것’(희망과 유머)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이를 현전시킴으로써 다른 병사들에게 마치 다른 선택지가 있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켜 상황을 반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치다에게 있어 위기 대처 능력이란 바로 절대적 공간으로서의 여기에 그러한 픽션을 심을 수 있는 언어의 리얼리티를 현전시키는 능력이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우치다의 상상력 사용술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며, 인문학의 기본을 환기시키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평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오늘날 인문학은 부재의 책으로부터 인용을 하는 형식의 책을 상상할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해 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인문학적, 혹은 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전용되면서 폐해를 낳는지도 식민주의 및 국민국가 연구를 통해서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인문학적 상상력을 마냥 찬양만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국가마저 주식회사가 되려고 하는 지금, 우리에게 주식회사가 아닌 형태의 공동체를 상상해낼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반복될지도 모르는 가라앉는 ’(그것이 주식회사가 될지 국가가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지만)에 갇힌 아이들에게 그곳이 지옥임을 분명히 지시하고, 그곳으로부터 탈출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도록 만드는 공동체의 언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찾아내지 못하는 한, 우리의 인문학적 상상력은 심각한 위기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인문학연구, 제2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