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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금지되어 있는 일을 굳이 하려고 한다면


 

 

 

요새 한국문학이 재미없어졌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문학이 재미있었던 시절, 문학은 ‘어떻게’ 재미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일본문학이 가장 뜨거웠던 1960년대 중반에 발표된 쿠라하시 유미꼬(倉橋由美子)의 『성소녀(聖少女)』(서은혜 옮김, 창비 2014)는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성소녀』는 당대 일본사회의 강한 정치성의 자장 속에서, 글쓰기의 정치성을 모색해가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일교조’라는 ‘교육노동자’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데 반발해 학교를 그만두고 ‘18금(禁)의 세계’로 치달리는 소녀 미키와, 한때 일본공산당 산하 조직에 있었지만 이제는 미국으로 가려고 전전긍긍하는 K. 우리에게도 분명 그리 낯설지 않은 이러한 ‘반사회적’ 성격의 등장인물들이 아직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었을 때, 문학은 분명 읽을 만했다. 스스로의 정치성을 구현하기 위해 수많은 당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던 시절, 설사 비정치성을 추구하더라도 그 자체로 문학은 정치적이었고, 재미있었다.

 

1960년대의 일본문학과 ‘성’

 

나아가 이 작품은 문학이 재미있었던 시절, 문학은 매우 ‘성적(性的)’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실제로 1960년대 일본에서는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와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郎), 코오노 타에꼬(河野多惠子), 요시유끼 쥰노스께(吉行淳之介) 같은 많은 작가들이 ‘성’을 언어화하는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무엇이 그들, 그리고 그녀들로 하여금 그토록 성을 말하도록 만들었을까.

 

1960년대 일본문학 속에서 갑자기 성 이야기가 많아지게 된 이유를, 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는 일본문화의 특수성이나, 단순히 안보 패배 이후의 좌절감, 즉 이상적인 공동체 창설을 위한 정치적 욕망의 거세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만일 그것이 맞다면, 문학의 성 이야기가 시들해지면 정치적 욕망이 강하게 표출되어야 할 텐데, 실은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즉 일본문학의 경우, 어떤 이유로든 성 이야기가 퇴색하게 되었을 때 정치적 욕망마저 시들해진 경우가 적지 않다. 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제도로서의 검열에 도전하는, 매우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을 말해야 한다는 이 시대적 강박은 어쩌면 격렬한 정치적 정념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미시마와 오오에에게 ‘성’은 일본 젊은이들의 ‘정치성’의 행방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사였고, 코오노와 요시유끼 같은 작가에게 그것은 몸이라는 곳에서 행해지는 가장 미시적인 정치의 현장이기도 했다. 카와무라 미나또(川村溱)가 지적한 대로, 60년대의 다양한 성 표현들이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관념’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 또한 그 때문은 아닐까.(『전후문학을 묻는다』, 소화 2005) 요컨대 동시기 일본 작가들은 성으로 정치를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성소녀』에 등장하는 ‘근친상간’이라는 파격적인 성의 형식 또한, 사고로 기억을 상실한 미키가 남긴 노트 속 이야기로 등장함으로써 소녀의 관념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파파를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것”(222면)이라는 확실한 목적의식으로 관념화된 근친상간은, 비극으로 승화되기보다는 작가의 정치성을 드러내는 기능이 더욱 강하다. 즉 쿠라하시는 근친상간이라는 테마를 통해서 자신의 글쓰기가 “금지되어 있는 일을 굳이 하려고”(135면) 하는 행위임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글쓰기의 ‘성화(聖化)’를 향한 열망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윤리적 ‘실패’에서 피어난 문학의 성공

 

물론 근친상간을 테마로 다룬 근대 일본문학은 이 작품만이 아니다. 이 소설이 발표되기 일년 전에도 미시마 유끼오가 어린 시절 근친상간의 경험으로 인해 불감증에 걸린 한 여인을 심리치료사가 치료해가는 이야기(『음악』, 1964)를 발표한 적이 있다. 하지만 불과 일이년 사이에 이러한 테마가 반복된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당대 일본사회의 현실 속에서 이것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성을 문학이 독점하기가 더이상 쉽지 않게 되어버린 상황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는 정신분석과 여성해방운동의 풍문 속에 성에 대한 고백이 신문이나 주간지의 상담코너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흔한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성을 고백하거나 타인의 성 이야기를 듣는 일이 일상화되었을 때, 성은 일생을 통해서 풀어야 할 신비의 영역이 아니라 그저 ‘사실’의 영역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상황에서 문학이 근친상간을 끄집어내는 것은 단순히 일반적인 성담론과 차별화되는, 더욱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나서는 행위 정도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보여주듯 문학 속에서 근친상간은, 성을 고백하고 듣는 행위가 즐겁기보다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어야 한다는 윤리적 판단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성소녀』가 그런 고통을 이끌어낸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작품 속의 근친상간은 실로 어떠한 충격도 주지 못한 채 단순히 ‘가능성’에서 ‘사실’로 추인되고 만다. 이는 근친상간을 이야기한다는 것조차 실은 “금지되어 있는 일”이 아니었음을 재확인시킬 뿐 아닌가. 결국 뛰어난 감수성과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쿠라하시는 미키를 ‘성(聖)소녀’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이 문학적 실패는 당시 일본사회에서, ‘성(性)’ 속에서 ‘성(聖)’이 추출되어나갔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을 굳이 하려고” 한다는 것의 의미가 제대로 연소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그 불꽃이 불과 일이년 후 오오에와 미시마에 의해 다시 훨훨 피어오른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문학이 재미있었던 시절, 하나의 실패는 더 큰 성공을 불러오기도 했던 것 같다.

 

창비주간논평 201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