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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금-여기의 외부로서 한문맥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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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도 중요하니까, 유용하니까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현대와는 다른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한자를 배울 의미는 충분히 있다. 하물며, 우리들이 탈피하려고 했던 말의 세계라면 더더욱.”

사이토 마레시, 『한문맥과 근대일본- 또 하나의 말의 세계-』, NHK 북스, 2007년


오늘날 동아시아의 인문학이 해결해야할 난제 중 하나는, 한문, 혹은 한문맥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건 이미 죽은 말이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사용했기 때문에 분명히 ‘우리 문화’의 일부이며, 그 흔적들을 어떻게든 보존-계승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으리라. 그 한편으로 최근의 중국의 팽창과 관련되어, 살아있는 언어로서의 한자의 실용성을 강조하는 입장도 조금씩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같은 한자문명권 중에서도 한반도나 베트남에 비해 한자를 폭넓게 쓰고 있는 일본의 학계는 어떻게 대처하려고 하고 있을까? 

위 책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중엽까지 한자를 통한 일본과 중국의 교류의 양상을 실증했던 『한문맥의 근대』(나고야대학출판부, 2005)라는 책으로 2005년 산토리 학예상을 받았으며, 현재 도쿄대학 비교문학비교문화과의 조교수로서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사이토 마레시齊藤希史의 최근작인데, 위의 문제를 사유하기 위한 참조항으로서 딱 맞춤하다, 서문에서 필자는 한자에 대한 다양한 의견에 성급한 대응을 하기 전에, 말의 역사를 좀더 꼼꼼하게 살펴보기를 제안한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어라는 언어 시스템 속에서 한문맥이 어떠한 기능을 수행해 왔는지를 살펴보기를.

가장 먼저 사이토는 일본의 경우 한자를 읽고 쓰는 행위가 급격히 퍼지기 시작한 것은, 한자를 가타카나를 섞어서 훈독하는 해석술의 코드화와 성리학 중심의 서적 위주로 된 커리큘럼이 일반화된 18세기 후반부터임을 강조한다. 즉, 성리학이 규정한 사서오경의 고서와, 이것을 훈독문이라는 형태로 읽는 법이 공유됨에 따라, 라이 산요우(頼山陽)의 『일본외사日本外史』 같은 한자전용의 책이 쓰여지고 폭넓게 읽혀지게 되었다고 한다. 중앙집권제와 과거제를 일찍감치 제도화하고 오히려 양명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한반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매우 ‘반시대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시간차’가 바로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의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점도, 한자문명권인 동아시아의 근대의 성립의 수수께끼를 이해하는 데 놓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필자가, 일본의 근대는 한자문화를 그저 중국의 문화로 상대화하고 표음문자 중심의 언문일치을 통해서 확립되었다는 기존의 인식을 송뚜리채 전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의도는 일본의 근대화 속에서 한자가 일정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사실에 좀더 오래 머무르며, 그 기능이 무엇이었는지를 좀더 구체화함으로써, 한자 시스템 속에 본래 존재했었던 두가지 성격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다.

사이토에 의하면 성리학을 통해서 수립된 일본에서의 한문맥은 기능성과 정신성이라는 두가지 초점으로 그려지는 타원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먼저 기능성은, 알파벳이나 가타카나 같은 표음문자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조어력과 다른 언어에 대한 대응능력을 의미하는데,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일본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번역어가 2개의 한자조합으로 만들어져 동북아에 퍼져,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슴은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한편, 정신성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시어의 해석을 베이스로 쓰여지는 한시라는 특수한 에크리튀르를 통해서 배양되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 공과 사라는 아이덴티티에 관련된 의식이 형성된다고 한다. 일본 근대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많은 관료들이 근대화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는 수의 한시를 남겼다는 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한문맥이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본래의 역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필자 역시 인정한다. 특히 한문맥이라는 타원의 한 초점을 이루는 정신성은, 새롭게 성장하기 시작한 “근대문학”이라는 언어 체계와 긴장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문장의 중심을 이제까지 축적되어온 말의 집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말하려는 사건이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언문일치적 소설이나, “개인의 신변잡기라도 그대로 재현하면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이라는 이념을 추종”하는 자연주의로 대표되는 일본근대문학은, 결국 “한문맥의 체계 속에 자신이 회수되는 것을 거부”하며, 한문맥을 이 세계의 외부로 만드는데 일정의 성공을 거뒀다는 것을 필자는 순순히 인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한문맥을 배제하면서 성립한 일본문학은, 일정한 전체성을 요구하는 소양素養으로서의 한문맥의 외부로 남으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결국 파편적인 지식의 집적물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제기야말로, 필자가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 가장 제기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물론 한문맥이 중화사상이라고 불리우는, 한족중심주의와 그 외부를 외부 그 자체로서 사유하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언어 시스템상의 단점은, 그것의 몰락과 현대의 언어적 환경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한문맥을 잃어버린 지금, 두 초점에 의해서 움직이는 타원형의 사고, 특히 그 중에서도 고문 해석 연습을 통해서 길러지게 되는 긴 폭의 시공간성 속에서 지금-여기를 사유하는 능력을 일본의 현대인들은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리라.

물론 사이토는 한문맥이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그 결과 현대는 왜소해진 사유체계를 지니게 되었다고 확정지으며 비분강개를 부추기려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한문맥은 일부 기업의 윤리, 혹은 풍류라는 고상한 취미의 형태로서 여전히 기능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실을 근거로, 현대에서의 한문맥을 실체화하고, 그 기능을 과장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다음과 같이 이유로 한문맥의 세계를 긍정하려 할 뿐이다. “현대에도 중요하니까, 유용하니까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현대와는 다른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한자를 배울 의미는 충분히 있다. 하물며, 우리들이 탈피하려고 했던 말의 세계라면 더더욱.” 한문맥을 고유한 전통 문화로서가 아니라, 다른 문화로서 놓고서도 충분히 사유할 가치가 있다는 유연한 사고는, 같은 문제를 풀어나가야할 우리들에게, 우리가 만들어갈 ‘내부’에 상응하는 ‘외부’로서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연세대학원 신문, 2007년 4월 9일, 걸리버의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