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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실타래를 쥔 고양이처럼

 



세속화의 기관으로서의 놀이는 도처에서 쇠퇴하고 있다. 현대인이 더는 놀 줄 모른다는 것은 새로운 놀이와 기존의 놀이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증가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실제로 춤이나 파티같은 놀이에서 현대인은 자신이 거기에서 찾을 수도 있는 것(잃어버린 것의 축제에 다시 접근할가능성, 성스러운 것과 그 의례로의 회귀)과 정반대의 것을 필사적으로 집요하게 찾는다. 그것도 스펙터클한 신종종교나 시골 무도회장의 탱고 레슨에서와 같은 어리석은 의식의 형태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의게임쇼는 새로운 예배의식의 일부이다. 이런 게임쇼는 종교적 의도를 무의식적으로 환속한다. 놀이에 그 자체의 순전히세속적인 사명을 되돌려주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과제이다.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호모사케르』나 『예외상태』등에 비하면 가벼운에세이로 읽혀질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런 글을 쓸 때의 아감벤을 이해하는 것이 더할나위 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에 언급한 그의 대표작은 사실상 이론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세련된 신역사주의적 작업처럼 비춰질 경향이 크고, 바로 그 때문에 아카데미에서는 아감벤이란 이름 하에 수많은 논문들이 줄기차게 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아감벤 자신도 심히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사물의 서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호모사케르』와『예외상태』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들에 주목하는 과정에서 놓치게 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세속화 예찬』은 더욱 소중하다.  그건 마치 에세이를 뺀 발터 벤야민을 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세속화 예찬』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 마술, 어린아이, 카프카, 사진, 조수들, 포르노그래피 등은 벤야민의 에세이에서 자주 볼수 있는 것이며, 그런 이유로 아감벤 역시 벤야민의 말을 차곡차곡 밟아간다.  마치 제자가 스승을 넘기 위해서 그의 그림자부터 밟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왜 아감벤은, 그리고 벤야민은 이러한것들-그러니까 정치-주권--권력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거나, 혹은 그것과 멀리 있어보이는 세계-에도 주목하는 것일까? 


단순히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존재들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뜨겁고, 딱딱해진 머리를 식혀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아감벤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비인격적인 것을 지칭하는 게니우스라는 신을 태어날 때부터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끄집어낼 때, 우리는 법이라는 딱딱한 공문서에 의해서 정의되는 인간’(호모사케르)과는 다른, 어떤 인간의 형상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게니우스에 마주칠 때, ‘우리 자신이 견딜 수있다고 믿는 것보다 무한히 거대한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엄습해올 때의 공항상태때문에,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어이없게도 그것을 일종의 특권으로 느끼며, ‘젠체하거나, 더 나쁘게는 겸손을 꾸며내며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그런 왜소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왜소한 존재로서의 인간이야말로, 근대 이후 만들어진 지나치게 비관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인간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가?


늘 주인공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는 것의 형상으로서의 조수또한 그렇다.  우리는 왕자와 결혼한 백설공주보다는, 그녀가 그렇게 떠나자마자 이야기 속에서 사라지는 일곱난쟁이들에게, 더욱 인간적인 것을 느낀다. 물론 아감벤이 이야기 속의 조수가 주인공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쓰지는 않는다. 그 대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잃어버린 것은 기억되고 충족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망각되거나 잃어버린 채로 남아 있기를 요구할 뿐이며, 바로 그 때문에 잊힐수 없다. 조수들은 이 모든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서 나는, 그러나 조수 대신 우리를 읽어낸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늘 기억하길 강요하며 마치 주인공인 양 살아가고 싶어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매순간 무수히 많은 이런 조수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자신 역시 누군가의 조수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을 잊고 살지 않는가?  ‘몸짓은 난감하기 그지없도록 요란하고, 얼굴은 무언극에서처럼무표정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존재 자체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이 애매모호’하다는 얘기는, 단순히 조수’에만 해당되지는 않겠다.


이쯤 되면 왜 아감벤이 이러한 형상에 대해서 쓰는지에 대해서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감벤주의자들처럼, 모든 인간이 알고보면 일종의 호모사케르라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아감벤은 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보이는 인간의 형상과 다른 곳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 것은 아닐까?  그 '인간'에 설령 궁극적으로는 호모사케르의 형상이 겹친다 하더라도, 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책에서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와 똑같은 비중으로, 법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살아간다고 믿고 싶어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들의 의미를 판독해 상속받고, 증여하려고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덜 중요한 것들의 소중한 유산을.


그것을 우리는 민주주의혹은 와야할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감벤은 그것 대신세속화Proranazioni’라는 말을 선택한다. 우리는 좀더 세속화되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다음과 같이;


1. 아무리 낡은 것을 손에 쥐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들은 우리가 진지하게 여겨왔던 경제, 전쟁, , 그 밖에 다른 활동의영역에 속하는 것까지도 장난감으로 뒤바꿔버린다. 자동차, 총기, 법적 계약이 불시에 장난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례와 성스러운것의 세속화 속에서는 공통적으로, 이제 바르지 않거나 억압적으로 느껴지는 렐리기오가 참된 렐리기오로, 즉 소홀함으로 이행한다……더이상 엄격히 준수되는것이 아니라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게 되는 렐리기오가 사용의 문을 열듯이, 놀이 속에서[예전의 사용법이 정지됨으로써] 비활성화되는 경제--정치의 역량[잠재성]은 새로운 행복의 문이된다.

 

2. 실을 감아 만든 공으로 고양이는 무슨 사용을 가능케 하는가? 그것은 주어진 영역내부에서 하나의 형태를 유전적 등록(포식활동, 사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이 자유로운 형태는 그 형태를 속박한활동의 형식을 여전히 재생산하고 모방하지만, 그 형식의 의미와 어떤 목적에 대한 일체의 의무적 관계를 텅 비게 만들면서 새로운 사용을 위해 그형식을 열고 이용할 수 있게 만든다. 실타래를 가지고 노는 놀이는 쥐를 먹잇감이 되는 것에서부터 해방시키며, 쥐가 포획과 죽음으로향해갈 수밖에 없음으로부터 포식활동을 해방시킨다. 그렇지만 그 놀이는 사냥을 정의하던 바로 그 형태를 연출한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귀결되는활동은 순수한 수단, 즉 하나의 수단으로서 그 본성을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목적에 대한 관계로부터 해방된 실천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즐겁게 잊어버리며 이제 자신을 그 자체로서, 즉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 보여줄 수 있다. 새로운 사용의 창조는오래된 사용을 비활성홤으로써만, 오래된 사용을 무의로 만듦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처럼
, 혹은 쥐 대신 실을 감아 만든 공을 쥔 고양이처럼, 목적 따위 상관없이 우리는 세속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감벤이 세속화라는 말을 쓴 것은, ‘민주주의가 권리/인권라는 이념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강하기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미로서의 세속화,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세속화와 어떻게 다른가? 친절하게도 아감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속화환속화라고 용어로 구별해낸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이;


이런 점에서 환속화secolarizzazione와 세속화profanazione를 구별해야 한다. 환속화는 억압의 형식이다. 환속화는 자신이 다루는힘을 그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만 함으로써 이 힘을 고스란히 내버려둔다. 따라서 신학적 개념의정치적 환속화(주권권력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신의 초월)는 천상의 군주제를 지상의 군주제로 대체할 뿐 그 권력은 그냥 놔둔다.

이와 반대로 세속화는 자신이 세속화하는 것을 무력화한다. 일단 세속화되고 나면, 사용할 수 없고 분리되어있었던 것이 그 아우라를 상실한 채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려진다. 이 둘 모두 정치적 작업이다. 환속화가 권력의 실행을성스러운 모델로 데려감으로써 권력의 실행을 보증한다면, 세속화는 권력의 장치들을 비활성화하며 권력이 장악했던 공간을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린다.

 

결국 아감벤이 ‘세속화’라는 말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빨리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향후 권력이 될지도 모르는 그 어떠한 것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그 노력이 가능할 수있는 장소를 삶 속에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그리고 그보다 앞서 벤야민은, 사상보다는 문학을, 문학보다는 낙서나 몸짓이나 표정을, 주인공보다는 조수를, 기억보다는 망각을, 은행가보다는 부랑자를, 어른보다는 어린아이를, 결정적으로 쥐 잡는고양이보다는 실타래를 쥔 고양이 쪽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 혹은 미래가 없는, 바로 놀이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