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피로사회'에서 '피로사회'로

 

 

 

올 상반기에 많이 회자되었던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이제 읽다. 여러가지로 유익한 대목이 많았지만, 아감벤에 대한 지나친 의식이 조금 안타까웠다.

 

물론 나로서는 저자의 아감벤 비판에 대해서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다음 대목:

 

아감벤은 주권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폭력의 공간구조적 변화를 전혀 포착하지 못한다. 성과사회의 한복판에서 아감벤은 주권사회를 기술하고 있다. 아감벤 사상의 시대착오적 성격은 여기서 기원한다. 이러한 시대착오로 인해 그가 추적하고 폭로하는 폭력은 오로지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정성의 폭력에 국한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에 특징적인 긍정성의 폭력, 고갈과 포섭으로 표출되는 폭력은 아감벤의 시야를 벗어난다. ...(중략)...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 p109

 

아감벤의 저작이 이론화되어 실천될 때마다 드는 느낌은, 위의 한병철이 지적한 '시대착오적'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그런 것과 비슷했다. 즉, 아감벤의 이론은, 우리가 여전히 늘 주권이라는 권력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집요하게 환기시키는 한편,  이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너도 결국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어!" 라는 위협을 가한다는 점에서, 피디수첩이나 카메라출동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아감벤의 이론이 팔레스타인이나 재일조선인, 탈북자, 나아가 피식민자 등의 사람들이 놓여진 정치적 포지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있어서 효과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여지가 없지만, 한병철이 '성과주의'와 '과잉긍정성'이라는 말로 풀어낸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정말로 무기력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감벤의 이론은, 신자유주의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병철이 아감벤 비판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데에는 불만이 있다. 그보다는 '부정성의 소실'과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들뢰즈-가타리 이론과의 관계성 속에서 좀더 성찰해봤었다면 좋았을 것 같고,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가 부정성과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일종의 보완관계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해봤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물론 소소한 불만이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우울증과 멜랑꼬리, 나르시즘, 피로 같은 감정을,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치환하지 않고도 나름대로 설명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이 시대는 이미 무의식이라는 개념조차 밀어내버렸다는 단언하는 대목은 놀랍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우리는 무의식마저 긍정해버리고 만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다양한 언표들이 다들 각각의 자리를 찾아, 부유하고 있는 것이 더이상 아무것도 없을 때, 부정성도 없고, 무의식도 없으리라는 시대적 진단은, 물론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묵시록적이다. 마치 꽉 닫힌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한병철은 약간의 틈을 허용한다. 그는, 내가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하기 때문에 초래되는 '피로'와 타자와 함께 있으므로 겪게 되는 '피로'를 구별하고, 후자의 '피로'의 경험을 권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인 '피로사회'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부정해야 될 '피로사회'로서의 오늘날과, 긍정해야할 '피로사회'로서의 내일.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어차피 피로를 피해갈 수 없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떤 '피로'을 선택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조금은 덜 피곤하고, 덜 우울한, 나와 사회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