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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버지의 귀




한국에 갔을 때, 무심코 아버지의 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아버지, 귀가 커졌잖요! "
내 말에 다들 정말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어릴 적, 삼형제 중 유일하게 나만이 아버지의 닮은 꼴이라고 불리곤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가 각자의 방식으로 퇴화를 시작했다. 폭식과 폭주와 담배와 운동을 좋아하고, 잠이 없는 아버지의 피부는 60이 넘으면서 한꺼번에 쭈그러들었고, 술을 멀리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늘어지게 자는 나는 동년배에 비해 퇴화의 속도가 비교적 늦다는 얘기를 듣는다. 따라서 요새 우리가 닮았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우리 둘이 닮았다는 것을 여전히 말하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남들이 늘 지적하는, 우리둘의 큰 눈이 아니라, 바로 작은 귀였다.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눈을 부라릴 때마다, 나는 눈을 가를 게 뜨면서 아버지의 작은 귀를 보면서 자랐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큰 눈으로 기억되었지만, 내게는 작은 귀로 기억되었다. 아버지의 작은 귀는 왜 지금 아버지가 이러이러 한지를 관상학적으로 얘기해주는 표식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귀는 속여도 눈은 못속인다고 하지만, 나는 눈은 속여도 귀는 못 속인다는 것을 믿었다. 말을 속이는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거슬러, 자기 의지대로 화가 안나도 눈을 크게 뜰 수도 있고 작게 뜰 수도 있지만, 인간이 개나 고양이가 아닌 이상, 귀를 쫑긋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도달한 귀결이다) 귀는 태어날 때의 그대로 박혀, 죽을 때 그대로 가지고 간다. 그리고 그 귀를 나는 하필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한테 받았다. 나는 내가 받은 아버지의 단점의 의미에 대해서 간혹 진지하게 생각해보곤 했다. 작은 귀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 삶에 미칠 파장에 대해서.

근데, 아버지의 귀가 커졌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식구들이 봐도, 분명 아버지의 귀는 커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한 칠십년 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고 하지만, 그 이런저런 일 속에 귀가 커진다는 게 속한다는 걸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버지는 드디어, 그 작은 귀의 표식이 갖는 부정적인 의미인,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꽉막힌 외통수라는 성격을 극복했단 말인가?

아마도 그럴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은 60이 넘은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그 눈빛을 두려하는 세상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비교적 착한 아들의 형상으로 비춰지고 있는 우리 형제들 역시, 아버지의 말을, 법이 아닌 이미 흘러간 유행가의 후렴구처럼 여기게 된지는 이미 십년도 더 지났다. 그렇게 입이 있지만 말을 없어지고, 눈이 있지만 그 눈에 힘이 들어가는 일이 없어진 그 십년 동안, 아버지의 귀만이 커졌다. 아버지도 이 '요즘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게 된 건, 아니 할 수 밖에 없었게 된 것은 아닐까?

물론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그건 아마도,  작아진 눈과 작아진 키에 비해, 귀의 퇴화만이 유난히 늦기 때문에 벌어진, 일종의 착시 현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의미만으로는 만족하고 싶지 않아 하는 우리들은,  자식들의 얘기는 조금도 들으려고 하지 않던 아버지가, 손주들의 말랑말랑한 얘기를 듣기 위해서는 심지어 귀를 키웠다고 기억하고 싶어한다. 어쩌면 좀더 진실에 가까운 건, 아버지의 작은 귀는 이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자기의 말을, 스스로 듣기 위한, 자기보존 장치 같은 것이라는 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은 신비의 의미확정은, 아버지의 생이 끝나기 전까지는, 유보하기로 한다. 아니, 아버지의 생이 끝나더라도, 그 유전자의 증표로서의 내 귀와 그 삶의 관련을 볼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