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시적인 것>을 과학적 아이디어들의 장에 위치시키는 것이 참된 것이 되려면, 시적인 앎과 과학적인 앎 사이의 경계가 흐려져 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하겠지요. 그 시적인 앎/과학적인 앎의 경계를 분명하게 가르는 사람들의 주장을 반증하게 되면 저의 이야기도 끝나게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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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적인 것', '신호', 223
'시적인 것'이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라면, 시는 '보면서 보여주는 것'이므로, 무엇인가를 지시해야만 할 것이다. 무엇을 지시하는가? 이것은 다시, ''시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실체적 속성에 관한 질문을 불러들이지만, 그는 '시가 허구적이므로 비지시적'이라는 논리실증주의적 입장을 비파하면서 '시적인 것'의 개념이 '마땅히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중략)..."시적 진술은 사실적 진술에 비해 그 지시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거기에 지시 기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쓰고, 덧붙여 앎/믿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점, 보다 정확하게는 "앎은 어느 단계에 있어서는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시적인 것'의 본질론적인 물음'을 무효화한다. 이것은 앞서 '신호'에서 시적인 것에 대해 제기했던 확정적 기술에 의한 답변의 요구를 '믿음'과 '앎'의 경계 문제로 환치시키는 것이다.
정한아, '시적인 것'의 실재론이라는 스캔들
(뭐랄까 일종의 번역 같은 글이지만...... )
황지우의 "시적인 것"은, 시에 관한 전통적인 질문의 주어인, "시"와 "시적 언어"를 회피한다.
그런 질문의 형식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회피하면서, 가능한 오랜 시간동안 존재와 마주했던 하이데거의 질문을 연상시킨다. 즉, 존재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져올 확정적 기술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고 믿었던 하이데거가, 존재가 어떻게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에게 "존재"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 그런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황지우도, 이미 있는 존재로서의 시에 대한 질문을 가능한한 회피하면서, 좀더 오랫동안, 그리고 좀더 가까이, 시와 함께 하는 시간을, 시와는 다른 글쓰기의 형식으로 전개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황지우가 하이데거와 다른 건, 그가 "시"를 어떤 세계 안에 구속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그는 문학적 전통에 의거해서, 장르-세계 창조의 형식으로 시를 얘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80년대적 상황에 의거해서, 한국,이라는 민족, 혹은 국가라는 세계-내-존재로서 시를 얘기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건,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시가 세계창조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내-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가, 시가 어떻게 세계-내-존재로서 존재할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굳이 그의 시를 펼치지 않더라도 '간주관성'이나 '정치'를 운운하는 [신호]를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렇게 그가 "시"가 아닌 "시적인 것"을 물었을 때, 그건 "시적언어"를 물었던 기호론-구조주의적 방법론과도 일선을 긋는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오랫동안 언어를 가져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 포즈는, 60년대 이후의 서구적 전통 속에서 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는 "시적인 것"이란, 서구적인 듯이 보이면서도, 마치 한국어의 "것"의 문법적 설명처럼, 의존적이면서도, 불분명하며, 한편으로는 광범위하다. (이에 대해 그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서구에서는 시적언어와 공적언어가 언어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언어적으로는 동일한 언어라고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있으리라.)
그렇게, 황지우의 "시적인 것"은, 한 편의 시를 구속하는 "시"의 이념적 자장과, 그것의 구성체이자 전부이기도 한 "시적 언어" 건너편을 향해 날아간다. 그래도 그것이 시일 수 있는가?, 아니 시적일 수 있을까 ,,,라는 우려섞인 질문은, "말벌의 집은 그 말벌이 그것을 말벌의 집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관계없이 말벌의 집"이라는, 의외의, 그러나 단호한 말로 되돌아온다. 그 말 속에 아마도 "시적인 것"이 또아리를 틀고 있겠지만, 우리가 그것을 볼수 있는지 어떤지는 물론 상관없다.
이런 황지우의 "시적인 것"은, 이미 선취되어 있는 이념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단순한 소통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건 마치 발터 벤야민의 신을 향한 글쓰기처럼, 아니, 유대교적 신앙도 없기에 더욱 고립적이다. 하지만 이런 고립은 결코 보편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내면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 있어서, 오히려 후설이후의 하이데거까지의 철학적 방향성, 즉 오늘날 우리가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앎과 믿음에 관련된 스터디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놓쳐서는 곤란하겠다. 또한, 시에 대한 의미화가 돌고돌아서 결국 시인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 즉 "내면"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에머슨과의 "소통"의 통로도 열어놓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황지우의 "시적인 것"은, 시와 시론의 상호보완적인 사유가 초래하는/발생시키는 근원적인 차이의 은폐에 대한 자기언급은 아닐까? 나아가 그는, 그 긴장을 낳는 상호보완적인 사고회로(모더니티라고 부를 수 있는)의 방기를 통해서, 좀더 근원적인 "차이"를 여전히 노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련지? (그러니까 글과 시인의 차이) 하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위한 더 강한 욕망에 결국 회수될 운명이라면, 그것은 아이러니인가 시적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