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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시적인 것', 시와 시적언어 사이의 길.




   그러니까, <시적인 것>을 과학적 아이디어들의 장에 위치시키는 것이 참된 것이 되려면, 시적인 앎과 과학적인 앎 사이의 경계가 흐려져 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하겠지요. 그 시적인 앎/과학적인 앎의 경계를 분명하게 가르는 사람들의 주장을 반증하게 되면 저의 이야기도 끝나게 되겠습니다. 
 
↑  황지우, '시적인 것', '신호', 223


'시적인 것'이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라면, 시는 '보면서 보여주는 것'이므로, 무엇인가를 지시해야만 할 것이다. 무엇을 지시하는가? 이것은 다시, ''시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실체적 속성에 관한 질문을 불러들이지만, 그는 '시가 허구적이므로 비지시적'이라는 논리실증주의적 입장을 비파하면서 '시적인 것'의 개념이 '마땅히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중략)..."시적 진술은 사실적 진술에 비해 그 지시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거기에 지시 기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쓰고, 덧붙여 앎/믿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점, 보다 정확하게는 "앎은 어느 단계에 있어서는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시적인 것'의 본질론적인 물음'을 무효화한다. 이것은 앞서 '신호'에서 시적인 것에 대해 제기했던 확정적 기술에 의한 답변의 요구를 '믿음'과 '앎'의 경계 문제로 환치시키는 것이다.

 정한아, '시적인 것'의 실재론이라는 스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