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실이 그렇게 불명료한데도, 야시키와 카루베, 둘다 각각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만은 명료하다. 하지만 이 나 한 사람에게 명료한 것이 어디까지가 현실로서 명료한 것인지 어디서 어떻게 잴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에는 모든 것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기계가 끊임없이 우리들을 재고 있고, 그 재어진 채로, 또 우리들을 밀어부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의심하면서 내일이 되면, 일이 모두 끝나서 편하게 되는 것을 예상하고, 돌아오는 임금을 받는 즐거움을 위해서 다시 피로도 싸움도 잊고 그 날의 일을 끝내버리면, 마침내 내일이 되어서 또 누군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사건에 만나야 했다.
요코미쓰 리이치, 기계, 1931.
일본 문학에서 "기계"라는 메타포가 쓰이게 된 것은, 아마도 나쓰메 소세끼가 처음인 듯하지만, 그것이 근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퍼지게 된 것은, 아마도 요코미쓰 리이치의 "기계" 이후가 아닌가 싶다.
네임 플레이트 제작소의 특허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직공들 사이의 의심과 싸움이 다루어져 있는 이 소설에서, "기계"는, 실생활에서 볼 수 있는 전기-물리적 장치가 아니라, 직공들의 일상생활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을 의미하는 메타포로 쓰인다. 즉, 문화, 이데올로기, 환상 같은 큰 범주를 대변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렇다면 작가는, 그 "어떤 것"을 왜 하필 기계를 빌어서 말하려고 하는 걸까?
기계가 메타포로 쓰이게 된 게, 작가가 그것을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울 뿐만 아니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계가 이데올로기처럼 이해하기 힘든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쉽게 결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요코미쓰가 기계에 대한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정확하게 재는, 그러니까 계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는, 인간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꾸준하게 재거나 계산하기에 서툰 존재는 아닐까, 라는 인식으로 출발한다.
그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왜 그렇게 많이 재고 있는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 공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재 보지만, 그것이 주인인지, 사모님인지, 특허권인지, 그 자신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또 왜 다른 직공에게 자신이 왜 맞아야 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가 재는 데 미숙한 이유는, 그가 단일한 시점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기를, 무의식/의식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기계는, 언제나 단일한 시점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는 어떤 존재자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상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더라도,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지 모르더라도 살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고, 그렇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 역시 사실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재는 능력과 관련해 존재에 관련된 질문을 던져야할 인간의 고단한 수고를 대신해주는 존재, 그것이 요코미쓰의 기계에 담긴 이미지라고 볼 수 있으리라.
따라서 그것이 우리를 밀어부칠 때, 혹은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재어질 때,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것은 실은 기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상실한 우리 본연의 모습, 즉 정확하고 꾸준히 재는 능력에 다름아닐 것이다.
하지만, 혹은 따라서, 우리는 기계를 부술수 없는 것은 아닐까? 재는 거 따윈 기계에게 맡겨버리고, 희희낙락하다가 새로운 사건에 직면하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