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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 일본

스놉과 짐승 사이―전후 일본의 우파와 역사성

 


 

1. 스놉이라는 형상 뒤에 남은 존재들

 

일본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을 둘러싸고 이미 다양한 논의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전후 일본을 방문한 한 철학자에 의한 정의는 오늘날 한국에서 유독 주목 받고 있다. 바로 헤겔 철학자로 알려진 코제브의 그것이다. 1959년 코제브의 눈에 비친 일본인들은 한가롭게 꽃꽂이와 다도를 하며 ‘평화’를 만끽하는 모습이었고, 그러한 모습 속에서 그는 역사의 종말 후의 ‘인간’을 봤다. 이미 미국과 소비에트, 중국 여행에서 ‘지금-여기’에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정’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역사와는 전혀무관한 ‘동물’로 정의한 이 철학자에게는, 유럽적 의미에서의 어떠한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논쟁도 하지 않고 형식적인 틀에만 얽매이는 일본인들도, 헤겔적 의미의 ‘역사’ 그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로 보였고, 이러한 일본인들을 그가 속물주의를 나타내는 ‘스놉’이라고 지칭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각주:1] 하지만 일본어적 문맥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서구 언어적 문맥에 따라 조어된 스놉이라는 개념에 일본어 시스템 속에서 배어나는 당대의 정치적 정념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와카마츠 코지의 영화 「실록 연합적군」(2007)은, 마치 일본어를 모르는 코제브 같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라도 할 듯한 친절한 ‘영상’으로, 1960년부터 1972년까지의 일본의 정치적 정념이 어떻게 발전해서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도입부에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의 갱신에 항의해서 벌어진 안보투쟁부터, 1968년 전공투,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의 정치적 사건들을 담담하게 요약하고 있는 생생한 자료화면에는, 한 서구 철학자의 일본을 향한 ‘시선’을 단번에 공허하게 만들어버리는 장면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코제브의 스놉이란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인들이 어떠한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논쟁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서구인들의 당위가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혹은 일본인 스스로가 서구 지식인들 앞에서는 그렇게 보이고 싶었던 자기 이미지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도 스놉이라는 형상은 여전히 실효성을 갖는다.

 

 

스놉이 1980년대 미국인이 본 근 미래의 주인공이기도 했다는 것은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의 배경을 지나치게 일본적으로 그렸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장식이 극도로 배제된 거대한 회의실에서, 해리슨 포드가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안드로이드를 앞에 두고 끝도 없는 질문을 해대는 장면은, 단순히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직 어머니에 대한 기억만이 없다는 오류를 제외하고는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이 안드로이드는, 인간에 대한 형식적 완벽성을 추구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코제브가 정의한 스놉의 형상과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감독 리들리 스콧은, 인간과 스놉의 경계가 희미해진 세계의 도래를 극도로 우울한 정서로 그리고 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인들의 정서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80년대 미국 영화 속에서는 이른바 ‘경제 동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에 대한 경계심과 상실감이 잘 드러난다. 주지하다시피 「다이하드」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돈’에 눈을 뜬 테러리스트 앞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장소는 바로 나카토미 빌딩
이 아니었던가. 코제브에 의해서 동물로 정의된 미국인들이, 비로소 ‘이건 아니다’라고 하며 성조기를 휘날리는 ‘미국인’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스놉의 등장과 때를 같이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스놉은 이미 역사의 한 부분이다.

 

 


 

역사 속에서 스놉이 반드시 비판의 대상만 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서구의 지식인들은 서구적 의미에서 봤을 때 어떤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논쟁도 없는 일본, 그러니까 설국의 ‘온천’으로부터 위안을 얻었고, 심지어는 그곳을 천국으로 찬양했으며, 상당수의 일본인들도 이를 환영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단순히 자기기만이라고 비판할 수만은 없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적-도덕적-종교적 논쟁의 부질없음을, 하룻밤 사이에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죽은 도쿄 대공습에서, 히로시마에서, 나가사키에서, 오키나와의 경험 속에서 이미 깨달았으니까. 어떠한 정치적-도덕적-종교적 행위로부터도 거리를 두는것이 자신들을 자유롭고, 평화롭고, 장수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신들이 스놉이라 불리든, 이코노미 애니멀이라고 불리던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수만 종류의 술과 음식과 온천과 섹스 파트너와 가방과 음악과 이야기와 컴퓨터 게임을, 그러니까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하고 ‘소비’하게 된 것은 일종의 ‘덤’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제 스놉은 더 이상 일본인만을 지칭하는 명칭은 아니다. 김홍중은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를 스놉들이 창궐하는 ‘스노브크라시’로 지칭하지 않았던가.[각주:2] 스놉은 바야흐로 국경을 넘어서 이동 중인 셈이다. 그렇다면 스놉의 종주국인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20여 년의 장기불황은 일본인들이 스놉으로 사는 것을 더 이상 쉽게 용인하지 않았다. 1980년대 『노르웨이의 숲』에서 1960년대의 뜨거웠던 정치의 계절을 ‘상실의 계절’로 추모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0년대 후반 발표한 『1Q84』에서 1984년 일본의 스노브크라시를 또 하나의 ‘상실의 계절’로 추인하며 장장 3부에 걸쳐 길고 길게 추모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 추모는 80년대의 스놉만이 아니라, 2000년대 초반아주 짧게 찾아왔다 이내 가버린 신자유주의 속의 스놉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겠다.) 그 많던 스놉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혹은 스놉이 사라진 일본에 남아 있는 자는 누구인가.


‘역사의 종말 뒤’에 출현한 스놉 또한 사라져버리고 만 일본에서 우리가 조우하게 된 것은 전혀 뜻밖에도 한류 드라마 주인공의 발자취를 좇아 한국을 ‘순례’하는 일본 여성들이었으나,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수상과 축구경기장에서 ‘욱일승천기’를 펄럭이며 ‘닛폰’을 연호하는 젊은이들도 빠뜨릴 수는 없다. 물론 60년에 걸친 자민당 장기 집권을 종식하고 ‘정권 교체’를 연호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잠깐일 뿐, 3・11 대지진 이후 우리가 텔레비전과 활자 매체를 통해서 조우하게 된 일본인들은 우리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국 드라마를 방송하는 후지 텔레비전에 항의하기 위해서 긴 행렬을 이룬 사람들의 모습을 시작으로, ‘위안부는 매춘부’라 주장하는 정치인에 이어 정말 한국인을 경악시킨 것은, ‘조선인을 죽여라’라고 선동하며, ‘바퀴벌레 새끼들’이라 욕설을 해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후 일본 헌법의 개헌을 당연한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베 신조와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에게 몰표를 던진 불특정 다수의 일본 국민들. 이러한 면면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그들이 스놉인 채로 역사가 종말하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코제브의 스놉론에 대한 일종의 오해이다. 왜냐하면 코제브에게 있어서 스놉은 역사의 종말 뒤에 오는 것도, 그 반대도 아니라, 역사와 늘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니까 앞서 살펴봤던 코제브의, 그야말로 한가롭기 그지없는 스놉의 이미지와 「실록 연합적군」 속의 과격한 정치운동은, 실은 거의 동시대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단 좌파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2. 화석화된 역사 좀비들의 멸망과 스놉의 탄생

 


일례로 와카마츠의 「실록 연합적군」이 빼놓은 과격한 정치적 운동의 장면 중에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사건( )이 있다.

 

 

 

 

미・일 안전보장조약 갱신을 저지하고자 일본 국회를 둘러싼 대규모 시민운동(안보투쟁)이 벌어진 지 다섯 달 뒤인 1960년 10월 12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연설 중이었던 당시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얼마 전 대일본애국당을 탈퇴한 17세 소년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의 칼을 맞고 숨진다. 사건 현장에서 즉시 체포된 야마구치 소년은 11월 2일, 도쿄소년감별소 독방에서 지급된 치약을 짜서 벽에 ‘七生報國, 天皇陛下萬歲’라고 쓴 후 목을 매 죽었다.

 

그의 행동과 최후의 말은, 일본 정치사에 1960년대 일본에는 좌파가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와 집회만이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말해 ‘일본도를 들고 혼자 뛰어드는 극우’의 존재를 각인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이른바 아메리칸 라이프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모방하기 시작한 사람들 속에 잊혔던 ‘역사’를 회상시켰다.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 중반 제국일본에서는 소년, 그리고 청년들에 의한 정치적 테러가 빈발했는데, 그들은 모두 ‘천황’의 이름하에 당시 정치인의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심판했다. 이러한 이들 중 더러는 면죄부가 주어졌고, 더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모두 ‘황기’를 기원으로 삼는 ‘황국사’라는 역사 속에 ‘열사(烈士)’로 기재되었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야마구치가 선행하는 ‘열사’에 자신을 동일화시키려고 했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체포된 야마구치 소년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참간장(斬奸狀)’을 봐도 알 수 있다.

 

너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적화를 꾀하고 있다. 나는 너 자신에게 원한은 없지만, 사회당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로서의 책임과 방중 시의 폭언, 국회난입의 직접적인 선동자로서의 책임으로 봤을 때, 너를 용서해둘 수가 없다. 여기서 나, 너에게 天誅를 내린다.—황기 2630년 10월 12일 야마구치 오토야[각주:3]

 

 

 

이 짧은 문장 속에는 ‘나’의 분노가 넘실대지만, 그는 그 감정을 ‘원한’으로 환원하길 원하지 않는다. 실제로 정치인 아사누마가 17세 소년 야마구치에게 어떠한 원한을 살 만한 행위를 했다는 것은 입증되지 못했고, 그것이 그의 행위를 단순한 ‘살해’가 아닌 ‘암살’로 분류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자신의 행위에 어떤 개인적 원한도 없음을 강조하는 것은, 정치라는 공적 공간 참여를 위해서는 ‘나’를 현전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사심’을 비운 ‘대리자(agency)’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17세 야마구치 소년은, 17세의 ‘나’를 표상하지 않는 ‘나’라는 자격으로, ‘일본’을 대리(=표상)하는 책임을 진 ‘너’에게 칼을 내린 셈이다.

 

정치적인 공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순간 ‘사심’을 배제한다는 것은, 서구적 의미의 근대적 정치사상과도 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여기서는 황국사의 기원이 되는 『고사기』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는 편이 더 타당하겠다. 일본 황실의 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난폭한 동생 스사노오노 미코토(須佐男命)의 ‘마음’을 의심하자, 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자신의 마음이 ‘청명’하다고 결백을 주장하는 장면은, 천황과 신하들의 관계성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황국사상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그러니까 천황 앞에 모든 가신들은 ‘사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며, 그런 조건하에서 모든 인간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마음의 레짐’이야말로, 황국사상의 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셈이다.


하지만 ‘사심 없음’을 주장하는 ‘나’는 동시에 황국사를 강렬히 욕망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야마구치의 일본적화 반대라는 이념은, 공산주의와 천황제가 양립할 수 없으므로 천황이 사라지면 황국사가 사라진다고 하는 위기감에 기인한다. 즉 황국사 속에서 삶의 숭고함을 깨닫고 이 역사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 17세 소년에게, 일본의 공산화는 곧 자신을 기재할 수 있는 ‘지평’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는 거의 화석화되어 있는 이 ‘황국’의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황국사 속에서 의미 있는 행위를 발굴하고 이를 모방해 반복하면서, 새로운 ‘기입’을 만드는 역사적 글쓰기를 지속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글의 맨 마지막에 황기라는 날짜의 기입은, 자신의 행위를 사회면이 아닌, 황국사 속에 기입하라는 명령과 다름없다.

 
역사를 소환하는 야마구치의 행위는 역사의 종말 뒤에 오는 스놉과는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봤을 때 코제브가 말한 스놉의 형상에 근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왜 코제브가 동물과 스놉을 굳이 구별하려고 했는가와 관련되는데, 그는 양자를 역사의 유무라는 결정적 차이에 의해서 구별했다. 그러니까 미국인과 소비에트인이 역사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갖고 있지 않은 채로 새로운 지평에 내던져져 지금 여기를 긍정하고 행복해한다면, 일본인들은 이미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도 이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건을 기입하는 데는 관심이 없이, 꽃꽂이와 다도 같은 전통으로서의 역사성 속에 매몰되어 행복한 것이다. 코제브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꽃꽂이, 그리고 일본도에 의한 정치적 테러 혹은 할복은, 기존의 역사성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답습한다는 점에서 모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를 누구보다도 빨리 눈치챘다. 그는 1961년에 누가 보더라도 야마구치 소년이 분명한 17세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1, 2(1세븐틴(19611월호), 2정치소년 죽다(19612월호))로 나눠 잡지 분가쿠카이(文學界)에 연재하는데, 이 작품으로 인해 프랑스로 망명 아닌 망명을 하게 된다. 야마구치를 성스럽게 만드는 기존의 역사적 서술(황국사)의 논리를 파괴해 우익 단체들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위 작품에서 오에는 황국사 해체를 위해 몇 가지 전략적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는 황국사적 내러티브가 배제한 그의 세대가 처한 실존적 상황의 위기와 그에 임하는 소년의 찌질함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 오에가 그리는 정치소년 는 흔히 사춘기 소년이 그러하듯이 자위행위 중독에다, 신체적 병약함과 뒤처지는 성적으로 인한 열등감 덩어리에, 그로 인해 이지메를 당하며 인정에 목말라 있는 왜소한 17세 소년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 전략은 세속적인 삶을 거부한 매우 성스러운 행위로 보일지도 모르는 소년의 정치적 행위란 것은, 실은 자신의 실존적 환경으로부터 도피해, 선행하는 이야기 속에 자신을 전적으로 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이유(?)로 절판되어 오에 전집 속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제2정치소년 죽다속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일본의 17세 소년소녀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었던 정치소년,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이념 속에서 서술된 황국사를 계승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인정/환대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GHQ 점령을 통해서 새롭게 이입된 민주주의가 공동체의 새로운 원리로 자리 잡아 가던 전후 일본 속에서 이미 효력을 상실한 황국사는, 자신의 명맥을 이어주고 마침내 화려하게 부활시켜줄 자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황국사에 뛰어든 그는 사람의 아들이 아닌 천황의 아들로서 안보투쟁 시위 반대운동과 히로시마 평화운동 저지 투쟁에 참여하면서, ‘쩡쩡 울리는 전 정신과 전 육체의 오르가슴’(지복)을 느끼며,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뉴욕, 모스크바, 베이징에 원폭을 날리더라도, 일본이 만약 공산화된다면 히로시마 원폭의 수만 배의 위력을 가진 핵반응 장치로 일본 전토를 날려버리더라도 상관없다고 하는 천황의 아들의 정의를 갖게 된다. 쿠데타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국방대학에 가야 하지만, 자신의 지진한 학업 성적으로는 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며, 그럴 경우에 천황의 아들로서 황국사 속에 등재되기 또한 쉽지 않음을 깨달은 , 마침내 패전 직후인 1945825일 아침에 할복한 열다섯 명의 열사이야기가 담긴 자인기록(自刃記錄)이라는 책을 받은 후, ‘배꼽 밑 약 4센티미터 부근을 옆으로 15센티미터, 깊이 0.5센티미터자르고 목 중앙보다 조금 밑, 5, 6 경추 사이를 잘라 후두부 앞쪽 피부 한 장만을 남긴’ 17세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각주:4]. 그렇게 선행하는 이야기 속에 자신을 동일시한 소년은 마침내 좌파 정치인을 죽이고 소년원 독방에서 목을 매 자살하게 되는데, 오에는 그 마지막을 황기 대신, ‘교사체를 끌어내린 중년 경찰은 정액의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는 사망 고지로 대체한다. 오에는 목을 맨 소년이 남긴 정액을 화석화된 상상계인 황기 속에는 기재되지 않는 실재로서 드러냄으로써, 황국사관이라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고자 한 것이다.

 
오에가 실재를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냄으로써 다시 위력을 발할 수 있는 극히 위험한 상징계를 확인 사살하고자 했다면, 미시마 유키오는 어떻게도 의미화될 수 없는 실재에 미를 입히는 것을 통해 이미 구멍 난 상징계를 봉합하고자 한다. 1961년 발표된 우국에서 미시마는, 1936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청년 장교들의 미완의 쿠데타인 226 사건을 배경으로 젊은 청년 장교 부부의 할복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미시마가 226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이 사건이 전전(戰前)에 이미 황국사라는 상징계가 파괴되었음을 방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황국사상은 천황의 지배하에 오륜(五倫)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이미지화한다. 하지만 청년 장교들에 의해서 일어난 쿠데타가 쇼와 천황에 의해서 반란으로 규정되는 순간, 황군은 반란군과 진압군으로 분열되고, 이제까지 전우애로 맺어진 동지들은 충과 우애 사이에서 고뇌하게 된다. 진압군 장교로서 친우가 일으킨 반란군을 진압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주인공 다케야마 중위는,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황국사상이라는 상징계에 균열을 가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후자에 머물길 선택하는데, 이러한 선택은 오에가 그린 정치소년과 똑같다. 다른 점은, 오에가 황국사 속에는 결코 기입될 수 없는 소년의 사소한 일상과 욕망과 죽음을 철저히 그로테스크하게 그렸다면, 미시마는 마찬가지로 황국사 속에는 결코 기입될 수 없는, 중위 부부의 성적, 죽음의 쾌락에 미라는 형식을 입혔다는 점이다. 단 이 작품에서 미시마가 입힌 , 단순히 개인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의 숭고미가 아니라, 상징계가 분열하기가 무섭게 이 기회를 빌려 철저히 개인적인 쾌락의 극한을 추구하는 집요함 속에 아로새겨지는 라는 점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지젝식으로 말한다면 오에가 상징계 너머에 있는 실재를 드러냈다면, 미시마는 상징계의 위기 앞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실재(the real), 현실계(the reality)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구멍 뚫린 상징계를 못 보도록 유도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타인 지향적이므로 형식만 있을 뿐 개인적 삶의 내용은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스놉의 형상에, 개인적 차원의 쾌락이라는 내용을 기입함으로써 이를 리얼하게 만드는 기능도 추가한다.

 

 

 

 

 1960년대 초반 우익소년의 테러로 시작된 오에와 미시마의 역사를 둘러싼 공방은, 1960년대 후반 일본의 근대사 전체로 확대되어 전면전 양상으로 바뀐다. 1965년부터 미시마는 다이쇼 원년(1912)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대한 역사극 풍요의 바다(4부작)를 연재했고, 이를 지켜보던 오에는 1967, 미시마보다 좀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 만연 원년(1860)의 일본의 한 지역의 정치적 대립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려는 젊은이들을 다룬 만연 원년의 풋볼을 발표한다.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대로 오에의 승리로 끝나는데, 이는 단순히 우파 역사관에 대한 좌파 역사관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시마가 철저히 우파보다도 더 우파적인 역사를 발굴해 이를 드러내고 미화하면서 보수화된 삶과 역사기술 자체를 무화하는 데만 시종일관하고 있는 사이에, 오에는 좌파 역사관과 우파 역사관을 모두 상대화하면서,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역사 속에서 찾기를 그만둔다. 그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는, 그것이 복제인 이상 누구나 진정성이 문제화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결국 죽음으로밖에는 증명될 수 없음을 냉철하게 전경화함으로써 소설과 역사를 분리시켰다. 이후 오에는 역사의 바깥에 서서 역사에서 미끄러져 가는 존재들을 기존의 역사서술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기를 모색했지만, 역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파와 좌파는 모두 파멸하고 만다. 그러니까 미시마는 1970진정성을 가지고 시도한 쿠데타가 실패하자 할복을 택했고, 지상에서 산으로 쫓겨 간 연합적군은 1972년 사상의 진정성 게임을 벌이다가 멸망한다.

 

이렇게 역사성에 강하게 의존한 미시마를 김홍중은 코제브적인 의미에서 순수속물(스놉)로 보았지만, ‘전후 민주주의를 부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봤을 때 미시마(혹은 연합적군), 스놉이라기보다는 그저 화석화된 역사의 좀비로 보는 것이 맞겠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좀 더 스놉다운 존재들은 따로 있다. 그들은 오에와 미시마, 혹은 전공투들의 이면에 가려져 있는 이른바 넥타이 부대다. 황국사나 소비에트 혁명사를 버리고 샐러리맨이 된 그들은, 우익과 좌파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현재를 역사 속에서 의미화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 그들을 구원한 것이 바로 야마오카 소하치나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이었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영웅만이 아니라 그 밑의 수많은 인물들의 삶에도 충실히 시민권을 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개항기 일본의 영웅중에서는 비교적 주목받지 못했던 사카모토 료마를 일약 특 에이급 영웅으로 격상시킨 료마가 간다, 앞서 전술한 영광으로만 가득한 역사서만이 아니라, 전후 오욕으로 뒤덮인 일본의 내셔널 히스토리를 대체하는 대안으로서 딱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국시대나 개화기의 역사적 인물 중 하나를 발굴해, 그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거나 모방하면서, 기업 활동을 마치 무사나 군인이 벌이는 전쟁처럼, 혹은 애국자가 벌이는 외교 활동과 독립운동처럼 성스럽게수행했고, ‘산업전사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존재들이야말로 코제브가 말한 의미에서의 명실상부한 스놉인 셈이다.

 

3. 역사수정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 그리고 넷우익의 탄생


스놉들이 세계를 제패할 것만 같았던
1984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경제는 서서히 하강 곡선을 그렸는데, 더불어 그들을 보호해준 냉전 블록도 물렁물렁해지기 시작해, 마침내 1990103일 독일이 통일되고, 1991년 말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다. 이 사건을 지켜보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코제브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구적 의미의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7, 일본에서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된다. 이렇게 다시 출현한 우파의 손에 의해 역사는 또  다시 출발점에 선다.

 

 

 
그들은 근현대사에 있어 일본인이 자자손손까지 사죄하도록 운명 지어진 죄인 같이 취급받는데 반발해, 일본의 차세대에게 일본인으로서 자신감과 책임을 가지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헌실할 수 있는 교과서를 작성하자고 선언한다[각주:5]. 이들은 동시대 일본 젊은이들이 일본이란 이름하에 수행되는 공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개인적인 문제에만 침잠되었다고 전제한 후, 그 원인을 일본 역사가 지나친 자학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아름다운 일본을 재건하고자 팔을 걷고 나선다. ‘새로운 역사의 필연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이론적 참조항으로 삼은 것이 바로 모든 역사는 픽션이다라는 명제로 대표되는 이른바 역사수정주의다. 역사가 주어를 선택해 고르고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서술어를 추가해 나가는 형식을 취하는 이상, 그러니까 내러티브로 구성되는 이상, 허구적 성격은 피할 수 없다. 어차피 역사가 픽션이라면 말 뒷면에 있는 진실보다는 그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좀 더 자신을 가지고 전달할 수 있는 양식 있는 역사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요컨대 그들의 논리에 따르자면 스놉은 역사의 종말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역사관이 일본인들을 스놉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은 이제 황국사의 좀비도 스놉도 아닌, 새로운 일본사를 만드는 설립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표상한다.


역사수정주의자로도 불리는 이들의 출현은 한국의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일본의 우경화 위험으로 전해지게 되는데, 물론 이는 일본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사람들, 미국에서는 1987년 출간된 앨런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을 읽는 사람들(이들이 얼마 후 아들 부시와 함께 등장한 네오콘(Neo-Conservative))이 출현했다. 따라서 이를 하나의 보편적인 흐름으로 간주한 탓인지 일본의 수정주의자들은 당당했고, 말이 많았다. 그들은 기존의 우파와 달리,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암살하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법적 테두리 안에서 논리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론적 근거로 도쿄재판이 전승국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임을 전경화하고, 난징학살 관련 사진이 날조임을 자료를 통해서 실증했으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증언이 아닌 증거를 요구했으며, ‘천황야스쿠니문제와 관련해서는 문화상대주의적 논리로 맞받아치면서, 최종적으로 피해자가해자를 바꿔치기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군국주의의 색조를 띠는 일본 우파들이 가진 전통적인 이미지를 순식간에 불식시키며, 우파를 두꺼운 안경테의 지적인 이미지로 바꿨다. 특히 이제까지 일본인들이 꺼려왔던 문제들을 정면에서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평가되기까지 했다.

 

 

 

실제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우파임을 자칭하는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전쟁론(1998)이라는 작품 속에서 자신을 검은색 뿔테를 쓴 지식인이자 투사의 화신으로 표상하는 반면, 좌파 지식인을 늘 같은 주장만 하는 속물형 인간으로 그림으로써 좌파와 우파의 이미지를 바꿔치기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바야시는 일본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영구 전쟁 금지’, 재일 외국인에 대한 차별 금지와 참정권 부여, 여성의 인권 등을 주장하는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 혹은 좌파들에게 이미 오래전에 점령된 현대 일본의 교육계와 미디어에 의해서 세뇌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 정치인의 망언이나 산케이신문의 사설만을 외신으로 내보내는 한국의 미디어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의외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90년대 일본의 미디어에는, 80년대부터 가라타니 고진이나 아사다 아키라 등을 필두로 하는 이른바 뉴아카데미즘 학자들 중심의 글이 게재된 겐다이시소(現代思想)히효쿠간(批評空間)을 읽으며 대학을 다닌 세대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전에 비해서는 보다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적인 관점으로 일본 사회의 문제를 풀어가는 경향이 점차 정착되게 된 것도 사실이다[각주:6]. 이런 뉴아카데미즘에 정면으로 반발한 고바야시는, 겐다이시소등은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지적담론의 유행으로부터 소외된 일본 젊은이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미디어가 일본인들을 위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본격적으로 의심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넷우익의 탄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고바야시는 그들이 무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익명으로 자기주장을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넷우익은
NHK아사히신문 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미디어가 공정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것을 좌파 언설이자 매국적 행위라고 비판하는 한편, 그들 생각에 교육과 미디어가 은폐하려는 진짜 정보, 자유로운 인터넷상에 게시하고 공유하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을 지키려고 한다[각주:7]. 물론 여기서 그들이 생각하는 진짜 정보의 대부분은 역사수정주의자들에 의해서 발굴된 것이지만, 전통적인 우익이나 역사수정주의자적 시각으로 봤을 때도 명백한 날조인 것이 적지 않다. 하지만 기존의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 것들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기로 작정한 그들에게, 인터넷상의 정보야말로 진실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각주:8].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미친 영향의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니까 넷우익(혹은 일베)이 문제인 것은 그들이 역사를 왜곡했다는 점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역사 인식을 대폭 수용하고 있는 그들이 역사라는 이름하에 논의되는 묵직한 정의와 신비들을, 일종의 법정 게임화했다는 점에 있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손을 거친 역사적 사건들은 국가 대 국가 혹은 좌파 대 우파의 법정 싸움을 위한 증거물로 전락해버리고, 그 법정 바깥으로 빠져나간 증거물은 인터넷상에서 네티즌들이 벌이는 인정 게임의 주요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인정 게임속에서 주된 인정 욕망은, 지식인들을 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을 바보 취급하는 지식인들을 한 방 먹임으로써 원한을 해소하고 싶은 다른 네티즌들을 향한다. 이로 인해 이른바 지식인’()네티즌’(정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며, ‘의 위상도 함께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

하지만 역시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일본 사회에 미친 가장 심각한 영향은, 그들이 일본에서의 좌파적 이념을 매우 직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일본의 신자유주의 수용을 거들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좌파 진영에 의해서 추진된 인권 중심의 교육(유도리 교육),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일본의 젊은이들을 약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국제 사회 속에서 일본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신자유주의 언설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기적인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실어 나르는 캐리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면, 그러한 인간의 영위를 기록한 역사도 이기적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이쯤에 이르면 역사는 어떻게 이기적인 유전자가 자기의 공격성을 상실하지 않고, 이를 원활하게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줬는가를 증언해주는 기록이자, 일종의 자기 계발을 위한 참고서 정도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말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각주:9] 속에서 탄생한 애니메이션이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2006)이다. 이 작품은 한때 닛폰진(일본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브리타니아 제국과의 전쟁에 패해 식민화된 직후, ‘일레븐으로 차별당하며 지정된 게토 속에서 살게 되고, 이러한 상황을 부정하기 위해 저항운동을 벌이는 내용인데, 저항운동이 약간의 성공이라도 거두면, 게토 시민 전체가 학살당하는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일종의 디스토피아이자, 브리타니아 제국이 미국을 상정한다는 점에서는 전후 일본에 대한 알레고리인 이 작품에서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가 신민들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은 매우 시사적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발이 빠른 자, 아름다운 자, 부모가 가난한 자, 병약한 몸을 가진 자, 출신도 성장도 재능도 인간은 각자 다른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차별받기 위해 존재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싸우고, 경쟁하며 그를 통해서 진보가 생긴다. 불평등은 악이 아니다. 평등이야말로 악이다. 권리를 평등하게 만든 EEU(EU)는 어떤가. 인기에 집착하는 중우정치에 빠졌다. 부를 평등하게 나누려는 중화연방(중국)에는 게으른 자뿐. 하지만 우리 브리타니아는 그렇지 않다. 싸우고 경쟁하면서 언제나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 브리타니아만 앞을, 미래를 보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각주:10]

 

신자유주의 이념을 마치 미국의 건국이념인 양 변주시킨 이 연설은, 현대의 일본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피식민자 쪽으로 동화하길 유도하고 한때 식민자였던 자신들도 브리타니아인(미국인) 정도는 아니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수사적 범위 안에 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동시에 일본의 우파들이 금기해온 반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도를 넘어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수정주의자들이 결코 드러내놓고 말하기 꺼리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극히 솔직하고, 노골적인 말로 천연덕스럽게 드러내면서 적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징후적이다. 왜냐하면 이는 오랫동안 역사수정주의자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인들이 암암리에 확신으로 믿고 있어도, 마치 밀교처럼 공공의 장소에서는 결코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불문율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입 밖으로 낸다는 것은, 역사 이전의 공간, 그러니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리바이어던 이전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증폭시키므로. 실제로 이 작품으로부터 3년 뒤인 2009, 1955년부터 장기 집권해왔던 보수 정당인 자민당은 무너지고 만다.


 

 

4. 좌파의 보수화, 우파의 짐승화 : 근거(Ground) 없는 세계로

 

2008년 리먼 쇼크로 인해 신자유주의의 허상이 무너졌고 이를 발판으로 2009년 민주당 정권이 집권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우파들은 당분간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리먼 쇼크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좌파들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 드러나고 있었다. 20071, 잡지 논좌에 발표된 아카기 토모히로의 「마루야마 마사오의 귀싸대기를 날리고 싶다31, 프리터. 희망은 전쟁이라는 글은[각주:11], 좌파에 대한 원한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월 10만 엔을 벌며 살아가는 31세의 프리터 아카기에게는 전후 좌파 지식인들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평화가 수상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10만 엔 남짓한 돈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프리터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의 무한 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 단위의 무한 경쟁 체제를 용인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도래 이후, 살아남기 위해 일본의 회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임금 삭감밖에는 없는데, 이러한 요구에 대해 좌파와 노동조합은 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의 신규 채용을 동결하는 식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지켰다. 이로 인해서 자신처럼 사회에 진입조차 못 한 채 평생을 빈곤층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 발생했다고 그는 파악한다. 인간답게, 아니 적어도 이전 세대와 같은 스놉으로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 속에서 각성한 아카기의 눈에는 일견 극히 온화하고 양식적인 슬로건으로서의 평화로운 사회, 일본의 고도성장을 담당한 베이비붐 세대가 사회의 모순을 다음 세대에게 밀어붙이기 위한 방책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카기의 글은 이러한 기만에 대한 각성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전쟁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전쟁은 비참하다.

그러나 그 비참함은 가진 자가 뭔가를 잃어버리므로 비참한 것이지, ‘아무것도 갖지 않은내 관점에서 보자면 전쟁은 비참하기는커녕 오히려 도전이 된다.

물론 전시에는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죽음이 항시 도사리지만, 그것은 국민의 거의 전부가 똑같다. 국민 전체에게 쏟아져 내리는 생과 죽음의 도박인 전쟁 상태와 일부의 약자만이 굴욕을 맛보는 평화. 그 어느 쪽이 약자에게 있어 바람직한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각주:12]

 

 

 

 

보는 바와 같이 그에게 있어 전쟁은 이른바 황국사 신봉자들이 생각하듯, 천황과 신민들이 하나가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좌파가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울부짖는 평화, 약자만이 굴욕을 맛보는, 무기력하고 정체된 시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 전쟁은 예를 들면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지식인들도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일등병에게 귀싸대기를 얻어맞는 굴욕공평하게주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인간의 삶을 단순한 생명 그 자체인 조에(zōḗ)와 가치 있는 삶을 뜻하는 비오스(bíos)’로 나눌 수 있다면, 31세의 프리터 아카기에게 있어서 지금의 평화야말로 조에이며, 전쟁이야말로 비오스인 것이다.

 

프리터 세대의 감성을 절규에 담은 이 글은, 2차 세계대전 시의 일본인의 삶을 조에로 규정하고, 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출발하자는 이른바 전후 민주주의의 가치관에 반한다는 점에서, 많은 지식인들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다면 왜 그 전에 혁명이나 시위 같은 방법은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우파가 바라고 있던 것 아닌가 등등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대한 회신으로 쓴 글에서[각주:13] 아카기는 투표만이 아니라 혁명이나 시위 또한 오직 사회의 다수파에 의해서만 성립될 뿐으로, 자신과 같은 소수파에는 통용될 리가 없다고 반박한다. 자신과 같은 진짜 힘없는사람에게 시위를 하라고 종용하는 것은 죽으라고 하는 말과 똑같다고. 그런 말을 던지는 좌파에 대한 원한은 더욱 노골화된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좌파는 평등을 운운하지만 그러한 인식은 부유층과 노동자라고 하는 구태의연한 대립 축을 고수하고 있을 뿐, ‘먼저 부유층이 존재하고 그 밑에 부유층에 의해 안정된 역할을 맡은 안정 노동층이 있으며, 그 밑에 안정 노동자를 위한 조정 역을 맡는 빈곤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좌파 지식인은 좌파로서 마땅히 주장해야 하는 평등에 대해서 철저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떠한가.

 

나는 그러한 일반적인 불이익 배분의 현상을 문제시해, 평등의 관점에서 공평한 배분을 실현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 하나의 형태가, 바람직한 안정성인 평화에 대한 불이익 배분, 전쟁의 배분이다.[각주:14]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빈곤 노동자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일본인이라는 것뿐인데, 좌파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철저히 비판함으로써 일본인으로서의 긍지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어차피 물질적 평등이 불가능하다면 감정을, 긍지가 힘들다면 공포와 굴욕을 공유하자는 이 제안은, 절대빈곤 노동자가 겪고 있는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전쟁밖에 없다는 절규가 좀 더 세련된 형식을 취한 것이지만, 지식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공포정치 국가, 혹은 생명과 사유재산의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국가 이전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고 하는 일종의 퇴행적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퇴행의 모습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이른바 거리로 나온 넷우익인재특회(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행동 속에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인이 겪고 있는 모든 사회적 문제를 재일 조선인/한국인, 중국인에게 돌리며, 욕설이나 총코라는 차별어는 물론이며, ‘조선인을 죽여라라는 말까지 태연하게 외치는 재특회<배해사>, 여러 차례 한국의 미디어를 통해서 대표적인 혐한 단체이자 인종 혐오, 파시즘과 관련하여 소개된 바 있다. 최근에는 이들의 활동에 대항해 맞불 시위를 벌이고, 이를 금지하는 법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마저 전해졌는데,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은 그들이 우파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취재한 야스다에 의하면, 학생운동의 경험과 문화적 소양마저 갖춘 기존의 우파들은, 그들이 드러내놓고 차이를 멸시하며 가장 저속한 방법인 욕설을 내뱉음으로써 교양 있는 일본인으로서의 이미지와 우익의 자긍심에 상처를 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며 분명히 선을 긋는다고 한다. 이러한 기존 우익들의 반응에 대해 중학교 2학년 때 야마구치 오토야 사건을 알고 우익사상을 공부해 마침내 배해사를 조직한 가네모토 다카유키는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아직도 민족차별과 배외주의는 천황폐하의 뜻에 반한다라고 잘난 척하며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나라가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한가로운 이야기다. 죽을 때까지 벌거숭이 임금님의 패션쇼나 하고 있으면 될 일이다.[각주:15]

 

 

천황을 벌거숭이 임금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이러한 언술은 그들이 기존의 우파들과 내러티브를 공유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자신의 삶의 형식을 새로운 내러티브로 구성할 능력은 부족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기존의 역사를 더욱 리얼하게 느끼며 이에 뛰어들었던(현실에서 도망쳤던) 기존의 우파 지식인들을 더 이상 추종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러티브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좌파적 내러티브를 교란하기 위한 단편적인 명제와 약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욕설만 남을 뿐이다. ‘자기 나라가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인식해, 스스로 이미 옷을 벗었고, 주위 사람들의 옷을 벗기려고 하는 지금, 이미 아무런 권력도 없어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천황의 패션쇼에 참가해 박수를 칠 여유는 없다.

 

이러한 인식은, 우파만이 아니라 311 이후 대의제 민주주의에 실망을 느끼고 천황에 친밀감을 느끼게 된 많은 일본인들을 적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더 이상 우파 지식인을 추종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수이기도 거부하고, 인간이 입는 어떤 옷도 벗기려고 하는 그들은, 더 이상 역사와 문화적 권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화석화된 역사의 좀비들이 아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보다 약한 동물을 찾아 떠돌아다니다가 이를 발견하면 우르르 몰려들어 갈기갈기 찢어 먹는 짐승에 다름 아니다. 이 짐승은 코제브가 말한 의미에서의 동물, 들뢰즈-가타리 속에 등장하는 동물, 법 제도 바깥으로 밀려 나간 호모 사케르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리바이어던 출현 이전의 인간의 형상에 다름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제 삶은 전쟁일 뿐이고, 평화는 예외일 뿐이다.

 

 

 

 

이러한 인식은 최근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는 만화 진격의 거인에도 공유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해 천연덕스럽게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과 싸우는 인류의 투쟁을 그린 이 만화는, 거인을 피하기 위해서 벽을 쌓고 지낸 100여 년의 성안의 평화를, 냉전 블록과 함께 시작된 일본의 평화에 포개놓는다는 점에서 지금-여기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볼 수 있는데, 주인공 엘렌은 이 평화를 가축의 안위로 일축하는 당돌한 소년이다. 마치 이러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벽이 허물어지는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거인들에게 인간은 마치 가축처럼 먹힌다. 이러한 아수라장을 보면서 한 병사는 지옥이라고 말했다가, 이내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아니 틀려. 지옥이 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착각했을 뿐이다.

원래부터 이 세계는 지옥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다. 친절할 만큼 알기 쉬운 세계……. [각주:16]

 

 

약자에게 있어 이 세계는 언제나 지옥이었다는 깨달음은 앞선 인용문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대사는 그렇다고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이행한다면 분명 나아질 것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믿음 속에서 스스로 성문을 개방한 일본인들이 조우한 것은, 언제나 천연덕스럽게 자신들을 잡아먹는 거인이었다. 때로는 이 거인들에 놀라 성을 더욱 높게 쌓기도 했다. 하지만 벽을 높게 쌓았던 닫힌 사회에서도 이는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따라서 앞서 본 아카기처럼 굳이 국가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은 이미 온통 약육강식이니, 그저 지금-여기에서 싸우면 될 뿐이다.

 

그리하여 작품 속의 전사는 눈앞에 있는 거인과 싸우러 가지만, 화면 바깥에 남겨진 일본의 젊은이들은, 누구와 싸워야 하는 걸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지 않을까. 그들 중 일부는 아사히신문 같은 미디어나, 국제화의 물결 속에서 뜻하지 않게 이익을 얻게 된 일본에 사는 외국인[각주:17]거인으로 보고 이미 투쟁에 나서고 있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어쩌면 이런 친절할 만큼 알기 쉬운 세계속에 자신이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왜 이제야 각성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배운 착각들의 수를 낱낱이 헤아리며 짐승으로서 자신을 각성시키려고 애를 쓸지도 모른다.

 

진격의 거인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 젊은이들의 절박함과 그로 인한 우경화의 조짐에 대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하는 명제가 리얼이 아니라 단순한 당위에 집착하는 인간이 만든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시켰기 때문만도 아니다. 이미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울 도화선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각자 자신들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줄 최후의 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게다가 그것이 언제 무너지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켰다는 의미에서가 아닐까. , 그 최후의 은 단순히 일본, 혹은 한국이라는 국가 블록만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최근 주목받는 젊은 사상가인 사사키 아타루에게, 311 이후 그 대지(ground)’ 그 자체였다. 2011311일 대지가 흔들림과 동시에, 쓰나미가 몰려오고, 정지된 후쿠시마 원전에서 얼마 지나 수소 폭발이 일어났다. 일이 그 지경이 된 데에는 분명 근거와 원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수많은 사람들이 SNS을 통해 그와 관련된 정보, 각자의 정치적 포지션에 입각해서 쏟아내게 된다. 일명 정보의 쓰나미로 일컬어지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정작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해 사사키는, 철학자답게 하이데거식의 관점으로 봤을 때 대지(독일어 Grund, 영어 ground)는 곧 근거임을 상기하고는, 311을 일본인들이 발을 디딜 땅이자 언어활동이자 사유의 근거 자체를 흔들어버린 사건으로 파악한다.

 

 

모든 것에는 근거가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매우 명확하게, ‘모든 것에는 근거가 있고, 원인이 있고, 이유가 있을 터라는 명제 자체에는 근거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근거가 있을 터, 라는 근거율 자체에는 근거가 없다고.[각주:18]

 

사사키에게 311은 이러한 하이데거의 말을 실감할 수 있도록 해준 사건이었으나, 그렇다고 그는 이러한 그라운드 없는 세계를 그 자체로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는 패전 직후 타락하자’, ‘벌거숭이가 되어 진실의 대지로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한 사카구치 안고를 예로 들면서 기존의 근거가 무너진 3.11이후를, 새로운 그라운드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계기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사사키적 문맥에 따르자면, 최근 동아시아에 출현한 우파청년들은 전후 베이비부머 좌파가 주장하는 평등과 평화, 그리고 지()와 윤리의 그라운드를 흔들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는 아직 미세한 진동에 불과해, 그러한 근거와 그 위에 쌓은 모든 것들을 무너뜨릴 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그라운드가 반드시 탄탄하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 탄탄하기 때문에 세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만약 그들의 그라운드가 흔들리면서 이 세계와 역사마저 소실되려고 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각오는 되어 있을까?

 

무엇을

향해

그는 돌진하지 않는가?

 

 

세계는 사라지고 있다, 나는 너를 떠받치지 않으면 안 된다.

 

 

-파울 첼란, 숨 돌림(Atemwende)중에서, 1967.  

 

 

 

 

혹은 그때 그들이 지키려는 는 누구인가. <끝>

 

『21세기 문학』 2013년 여름호 발표

 

 

 

 

 

 

 

 

  1. Kojève A,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Hegel, paris, Gallimard, 1947/1968, 436~437쪽. 단, 한국에 코제브의 스놉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김홍중의 「삶의 동물/속 물화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사회비평』, 2007년 여름호)에 의해서이다. [본문으로]
  2.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79쪽. [본문으로]
  3.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에서 참조. [본문으로]
  4. 우파소년을 다룬 소설에 등장하는 황국사와 관련된 역사서는 그 자체로 성경처럼 신성하게 다뤄진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미시마 유키오의 장편소설 『풍요의 바다』 제2부인 『분마(奔馬)』(1967)는 1930년대 우익청년의 테러를 다루고 있는데, 작품 속에 메이지 시대 초기 구마모토에서 일어난 사족반란의 얘기를 다룬 『신풍련사화』라는 역사서가 액자 소설의 형식으로 삽입된다.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저항하여 일어난 사족들이, 총이 아닌 일본도와 철저히 황국신앙에 근거한 계시에 따라 대항하고 패배하자 약 100여 명이 일제히 할복하는 ‘장엄한’ 이 내러티브는, 사실 세계사와 일본의 내셔널 히스토리 속에서도 배제되어온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철저히 황국신앙을 따랐는데도 패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신풍련사화』의 저자가 텍스트의 말미에 ‘그만큼의 겸허한 정신의 집중, 그만큼의 순일 무구한 뜻에 왜 신의 도움이 따르지 않았는가’라는 수수께끼를 던지고 있는데, 이렇게 역사 속 사건의 의미를 신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풀고자 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이미 근대화를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사에서는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에와 미시마의 소설 속에서, 배제된 역사이자 금서인 황국사에 충격을 받고 매료되어 역사/텍스트의 ‘신앙’에 눈뜬 정치소년은, 신으로서의 천황에 대한 자기 신앙의 ‘진정성’을 희구하며, 그에 대한 답례로서 ‘계시’를 기다리고, 마침내 그러한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에 나선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소년들은 신이어야 할 천황이 대중소비 사회의 일원인 양 행동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관념상에서 ‘순수천황’을 만들어(더러는 자신을 천황으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그 존재를 향한 인정투쟁을 벌이기까지 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단지 다른 것은 오에가 그러한 진성성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명석한 사고실험의 내러티브를 통해서 보이고자 했다면, 미시마는 그것을 자기 삶의 차원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증명했다는 점이다. [본문으로]
  5. 일반사단법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공식 홈페이지 중 「취지서」 1997.1.30. http://www.tsukurukai.com/aboutus/syuisyo.html [본문으로]</새로운>
  6. 이렇게 담론상의 권력을 좌파가 쥐게 되는 것은 좌파의 승리라기보다는, 장정일이 『구월의 이틀』에서 통찰력 있게 말했듯이 진짜 정치권력과 물질을 쥔 우파의 선물로서 해석할 수 있다. 장정일은 스스로 창출한 한국 네오콘의 거장 ‘거북선생’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바람직한 문명국가의 모습은 우파가 권력과 물질을 차지하고, 담론은 좌파들에게 주어서 비판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거야.”(『구월의 이틀』, 랜덤하우스, 2009. 296쪽.) [본문으로]
  7. 이렇게 미디어와 싸움을 벌이는 것은 넷우익이 처음은 아니다. 예를 들면 1960년 12월에 『주오고론(中央公論)』에 발표된 후카자와 시치로의 「풍류몽담」은 좌파 혁명에 의해서 천황과 황후, 황태자가 차례차례 살해되는 꿈을 꿨다는 이야기인데, 이 텍스트에 격분한 17세의 소년 고모리 가즈타카가 이 글을 게재한 『주오고론』 사장 자택에 침입했으나, 그가 부재중이어서 가정부를 죽이고 마는 사건이 일어나, 세상에 파문을 던지게 된다. 이 텍스트가 당시 일본의 봉건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비판한 것인지, 아니면 좌익사상을 비판한 것인지를 두고는 논의가 분분하나, 이 텍스트를 읽을 때 프랑스 혁명, 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큰 이야기(세계사)를 참조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본문으로]
  8. 이런 그들의 활동은 일베보다는 지금은 그리 주목받지 않는 딴지일보와 다음의 아고라 쪽과 더 유사하다. 왜냐하면 아고라나 딴지일보가 조중동을 명확한 표적으로 설정한 것처럼 넷우익도 「아사히」 신문을 표적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네티즌들이 우익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 데에는, 이미 자신들의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미디어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좌파 지식인들이 인터넷이라는 환경에 대한 적응과 활용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았다는 이유들이 지적된다. 반면 한국의 경우, IMF로 인해 출판업 자체가 위기에 직면해 좌파 매체들이 사라져가는 상황 속에서, 취직의 길이 막힌 운동권 세대들이 대거 IT 산업에 참여하면서, 넷 자체는 좌파 친향적인 언설들을 여과 없이 내보낼 수 있는 대안적인 미디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변희재와 일베는 좌파에 대한 대항의식을 분명하게 한다는 점에서 넷우익과 같지만, 태생적 측면에서는 다르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본문으로]
  9. 2000년대 일본에서는 먼저 살아남기 위해서 기존의 공영기관을 ‘민영화’하겠다고 추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신자유주의)가 전면에 나섰고, 그를 ‘역사’로 커버한 아베 신조(역사수정주의)가 후면에 있었는데, 2006년에는 드디어 아베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본문으로]
  10.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제1기 제6화 중. [본문으로]
  11. 赤木智弘, 「『丸山真男』をひっぱたきたい─三一歳、フリーター。希望は、戦争。」, 『論座』, 2007년 1월호. [본문으로]
  12. 赤木智弘, 『若者を見殺しにする国:私を戦争に向かわせするものは何か』, 双風舎, 205쪽. [본문으로]
  13. 赤木智弘, 「けっきょく、『自己責任』ですか─続『丸山真男』をひっぱたきたい』, 『応答』, を読んで」, 『論座』, 2007년 4월호. [본문으로]
  14. 앞의 책, 221쪽. [본문으로]
  15. 야스다 고이치 지음, 김현욱 옮김, 『거리로 나온 넷우익-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후마니타스, 2013, 166쪽. [본문으로]
  16. 이사야마 하지메, 『진격의 거인 2』, 고단샤, 19쪽. [본문으로]
  17. 예를 들면 1980년대까지 재일 조선인 차별에 시달렸던 절대 ‘약자’인 강상중 씨는 국제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 여성들이 동경하는 지식인 1위에 올랐으며, 마찬가지로 교원인사의 불평등으로 인해 교사의 꿈을 접었던 손정의(손 마사요시)는 IT 혁명을 일본에 보급시키는 과정에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한국에서 그저 ‘잘생긴’ 배우 중 하나였던 배용준은 2000년대 일본 연예계에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거인’으로 우뚝 섰으며, 일본 전자업계의 자존심이었던 샤프는 삼성과의 TV 경쟁에서 밀려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2000년대 한국의 약진은, 일본 젊은이들(특히 남성)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굴욕을 안겨주는 ‘거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본문으로]
  18. 佐々木中 (외) 『思想としての3・11』, 河出書房出版社, 2011.p14-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