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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다원적 우주



브랑키 "천체에 의한 영원"으로부터 [인생의 갈림길에 직면한 적이 전혀 없는 인간이 정말로 있을까? 자신이 피한 길을 걸었다면, 개성은 그대로이면서도, 완전히 다른생활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한쪽은 빈곤, 치욕, 복종으로 통하는 길. 다른 한쪽은 명성이나 자유로 통하는 길이다. 이쪽에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행복이. 다른 쪽에는 사나운 여자와 황폐. 내가 말하고 있는 건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적용된다. 우연에 맡기든, 선택을 하든 똑같은 것으로, 숙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숙명은, 영원 속에서는 입각할 수 없다. 영원은 양자택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지구에서 인간이 걸어온 길을, 다른 지구에서는 그의 분신은 걸어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의 생활은 두 가지로 갈라지고, 각각에 대해 하나씩의 지구가 있으며, 나아가 또 두 차례, 세 차례, 수천 차례로 가지쳐 간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완전한 분신과 그 분신이 또다시 모습을 바꾼 것이 수도없이 만들어져 간다. 이들은 늘 그의 인격을 체현하면서 그 수를 늘려가지만, 그 하나 하나는 그의 운명의 파편을 가지고 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지상에 있어서 이렇게 된 것들 그 모든 것에, 어딘가 다른 곳에 서는 다른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지구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자신의 전생애를 살고, 그 외에도, 다른 곳에서 수만이라는 다른 생애를 살고 있는 것이다.] 큐스타브, 제프로와, "유폐자", 파리, 1897년, 399페이지 인용   

■ 발터 벤야민, Das Passagen-werk, 중   


 "그래서 낮에는 처박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거야? 철학자의 생활이군. 한밤중이 되면 빨간 스포츠카로 달리는 철학자인가?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다원적 우주라는 것은 어떤 거지?"
 버드는 카미코가 기쁨으로 긴장하는 걸 뜨거운 만족감과 함께 바라봤다. 버드는 지금, 갑자기 그녀의 방을 방문해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한 무례에 대한 보상을 수행한 것이었다. 카미코의 몽상에 대해서 주의깊게 귀 기우려 줄 사람이, 버드 외에는 그만큼 많지 않을 테니까.  "우리들이 여기서 얘기하고 있잖아, 버드. 우리들에게는, 우선 이 현실 세계가 하나 있는 거야." 그렇게 카미코는 말하기 시작했다, 버드는 새롭게 위스키를 따른 글라스를 아이의 장난감처럼 소중하게 손바닥에 올려놓고 청자의 역을 자청했다. "그런데, 나나 네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포함되어 있는, 여기와는 다른 수없이 많은 다른 우주가 있는 거야, 버드. 우리들은 과거의 여러 시기에, 자신이 살지 죽을지가, 반반이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어. 예를 들면 나는 어릴 때에 발진티프스로 아차하면 죽을 참이었지. 나는 내가 죽음을 향해 내려갈까, 그렇지 않으면 회복으로의 언덕을 올라갈까의 인터체인지에 서 있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바로 지금, 너와 같은 이 지구에 있는 나는 다시 살아나는 방향을 선택한 셈이지. 하지만 그 순간에, 또 하나의 내가 죽음을 선택했어. 그리고 그 빨간 발진뿐인 내 어린 시체의 주위에는, 죽어버린 나에 대한 손톱만큼의 추억을 가진 사람들의 우주가, 진행하기 시작하는 셈이지. 이봐 버드? 죽음과 생의 분기점에 설 때마다 인간은, 그가 죽어버려 그와 관계없는 우주와, 그가 여전히 계속해서 살며 관계를 맺는 우주, 이 두가지 우주 앞에 있는 거야. 그리고 옷을 벗어버리듯이 그는, 자신이 죽은 사람으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뒤에 방치하고, 계속 살아야 할 우주로 내려오는 거지. 거기서, 한 인간을 둘러싸고, 마치 나무 줄기에서 가지나 잎이 갈라지듯이 갖가지 우주가 튀어나오는 거야. 내 남편이 자살했을 때도, 그러한 우주의 세포분열이 있었어. 이 나는 남편이 죽어버린 쪽의 우주에 남겨졌지만, 남편이 자살하지 않고 계속 살아있을 저쪽의 우주에는, 또 하나의 내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거야. 한 인간이 요절한 후에도 남아있는 우주와, 그가 죽음을 면해 살고 있는 우주, 이러한 형태로 우리들을 둘러싼 세계는 늘 증식해 가. 내가 다원적 우주라고 부르는 건 그러한 의미야. 너도 아이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않는 편이 좋아. 아이를 축으로 해서 분기한 또 하나의 우주에서는, 살아남은 아이를 둘러싼 세계가 전개되고 있으니까. 그곳에서는 행복에
넘치는 젊은 아빠인 네가, 부러워할 만한 소문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 나와 축배를 들고 있을 거야. 됐어? 버드."

■ 오에 겐자부로, 다원적 우주, 1964년.    


  며칠 뒤 토마스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앞 장을 보충하는 뜻
에서 나는 이 생각을 여기에 인용하겠다. 우주에 모든 인간이 다시
한 번 태어나는 혹성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모든 인간
은 지상에서의 그들 삶을 회상하고, 그들이 지상에서 했던 모든
경험들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또다른 어떤 혹성이 있어서 우리 모두가 앞서 산 두 삶의
경험을 가지고 세번째로 태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계속 한 단계(한 삶) 더 성숙하여 새로이 태
어나는 더 많은 혹성이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영원한 재귀>에 대한 토마스의 비전이다. 
  지상에서(제1혹성, 무경험의 혹성), 혹성에서 우리는 다른 혹성
들에서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데 대해 아주 막영한 표
상밖에 할 수 없다. 인간은 보다 더 현명해질 것인가? 성숙이라
는 것이 도대체가 인간의 가능성에 놓여 있는 것인가? 인간이 그
러한 성숙에 반복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유토피아적 이상향의 시각에서만 낙천주의자와 비관주의라
는 두 개념을 의미있게 적용할 수 있다. 낙천주의자는 제5 혹성
상에서 인류의 역사는 보다 적게 피비린내 난다고 믿는 사람이요,
비관주의자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4.

 
 



다원적 우주라는 세계관에는, 지금-여기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깊숙하게 깔려 있다. 지금-여기 밖에 살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다른 나의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많은 수수께끼가 존재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다른 나"의 가능성을 믿거나, 그 "다른 나"와 함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많이 목격해왔다.

내가 다른 집에서 태어나거나, 혹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지금의 나보다는 좀더 나은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은, 일견 타당해보이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참으로 허황되기 그지 없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걸 믿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를테면, 박찬호나 박지성이 한국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하는 자조적인 질문들은 웹의 댓글란에 수도 없이 올라와 있다. 그들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한국에 남아 있었을 박찬호"를 결코 잊지 않는 것에 의해서, 그 존재를 일정 부분 실체화시키는 데 성공한, 대단한 사람들이다. (사실 한국의 정체성은 그런 댓글류 속에 담긴, 한국의 후진성에 대한 집착을 통해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걸까?)

하지만 위의 몇가지 인용이 얘기해주는 것은, "다른 나"란 것은 실은 다른 혹성에서나 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한 선택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결정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하지만, 그 선택을 통해서 버려진 '나'라는 존재가 다른 혹성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한 작가는, 그저 살고 있을 거라고 썼고, 또 다른 작가는 여기보다 더 행복할 지도 모른다고 썼고, 또 다른 작가는 성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썼을 뿐이다. 동일한 조건에서의 "다른 나"의 가능성이란, 결국 그 정도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다원적 우주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그리고 왜 우리가 이 세계 안에서 세포분열을 시작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어떤 개인적인 체험들이 우리들에게 이 세계를 쪼개서, 여기와 거기로 나누도록 만드는지 하는. 그리고 그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도대체 무엇인지 하는. 

오에의 경우, 현재의 참을 수 없는 고난과 슬픔이, 안식할 수 있는 다원적 우주 속으로 우리를 유혹한다고 설명한다. 쿤데라의 경우는, 더할나위 없이 바보같고 유치한 여기의 삶들이, 한 개인에게 성숙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다원적 우주의 꿈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렇게 다원적 우주 속으로 가버리는 바로 그 순간, "다른 나"의 가능성은 유실된다는 것 또한, 오에와 쿤데라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도망가는 것이라는 걸. 따라서 오에의 경우, 다른 세계로 가면서까지 지켜야할 내 자신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지금-여기를 받아들이는 다른 나를 만들었고, 쿤데라의 경우 토마스가 다른 나라로 망명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토마스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창조된 "다른 나"들은, 다원적 우주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