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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밥과 달리기 ▶ 작년부터 살이 찌고 빠지지 않게 되었다. 내게도 이런 날이 찾아올 줄이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늘어나는 뱃살을 방치했던 나는, 솔직히 조금 뿌듯했던 모양이다. 튼실히 부풀어 오르는 배는, 내 지난 날의 궁핍과 고생이 다 끝났음을 말해주는 증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 '어둠'의 시절들을 종종 떠올리며 감회에 젖곤 했다. 그러니까 집을 떠나 일본에서 혼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배부름이 아니라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밥을 먹던 시절의 기억들, 아무리 맛있는 밥이더라도, 그저 허기를 달래는 그저 한끼의 칼로리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기억들을,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 시절 그렇게 허기를 느꼈던 적은 없다. 한국에 비해 적은 양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그 시절 나의 문제는 .. 더보기
그의 시를 읽으며 견디는 며칠... 너는 금속 세공사의 아들이었고 너는 아파트 수위의 아들, 나는 15톤 덤프트럭 기사의 아들이었으므로 또 새봄이 온 데다 공업고에 가야 했으므로 우리는 머리색을 노랗게 바꿔야 했다 박 준, 잠들지 않는 숲,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또 새봄이 온 데다" 바빠져, 밀린 일을 하기 싫어 빈둥거리며 시집을 읽다가, 위의 구절에서,,, 뭐 단순히 금수저/흙수저 얘기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뭔가가 바로 "또 새봄이 온 데다"이다. 그러니까 "~의 아들이었으므로 공업고에 가야 했다"라는 흔한 담론의 질서에, 시인은 "또 새봄이 온 데다"를 슬며시 껴넣음으로써, 담론의 질서를 뚫고 나가 이를 가지고 논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희들은 모르지, 공업고에 .. 더보기
발언권에 대한 생각 발언권이 주어진다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수업에서, 회의에서, 식사 자리에서, 짧은 미팅에서 내게 주어진 발언권을 모조리 행사한 후, 마침내 내가 확인하게 된 것은 오늘 내가 뱉은 말들이 결국은 소용없었고, 소용없으리라 하는 자각이었다. 특히 오늘 2,3시간을 함께 한 선생님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웃고만 있어서 더욱 그랬다. "선생님, 오늘 왜 말이 없으셨어요?" "저는 원래 말이 없어요." 말없이 놓인 잔을 비우는 선생님이 부러웠고, 이 선생님의 말을 듣고 싶어졌다. 하지만 말씀이 없으시다. 듣고 싶은 선생님이 침묵하는 동안, 오가는 다른 말들은 그저 성가실 뿐이다. 차라리 나는 왜 그렇게 말이 많았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편이 낫다.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인문학의 무력함과 그 무력함에 .. 더보기
페이스북과 정치성 시절이 하수상해서인가, 자기검열이 심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미묘한 뉴양스의 차이를 지닌 글들이 서로 논쟁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나는 종종 구별없이 에 클릭한다. 이건 열심히 쓴 글이라, 이건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생각해볼 만한 것이라, 이건 재미있어서, 이건 슬퍼서, 혹은 반가워서, 등등의 이유 모두가 로 하나로 수렴된다. 때론 도 하지만, 내게 그 의미는 모두에게 '공유'를 원한다기보다는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런 식으로 자기 변명 같은 걸 하다가, 사상의 일관성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내가 어느 쪽인지 묻다가, 그 반대쪽은 지울까 하다가 말다가, 누군가로부터 왜 그 딴거에 좋아요를 눌렀냐는 핀잔마저 들으면서, 결국 자기 검열 같은 말을 떠올리면.. 더보기
글쓰기와 윤리 지난 가을 다음과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쓰려고 하다가 쓰지 못했다. "새 수영장을 구했다. 1층에 있는 수영장으로 저물녁에 수영을 하고 있으면 석양이 보이기도 한다...." 새 학교에 있는 수영장은 1층에 있다. 이 학교에 올 때까지 느꼈던 석연치않은 불안은, 이 수영장을 보는 순간 바로 해소되었다. 충분히 책을 넣을 수 있는 연구실에, 1층 수영장이라니. 나는 내게 찾아온 이 행운을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다. 수영을 하면서 나는 종종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을 떠올렸고, 그 때마다 더러 물을 마셨었다. 수영을 끝낼 때면 세월호 이후의 글쓰기란 이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쓰는 일보다 삭제하는 일이 많아진 대신,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늘어났다. 정작 수영장은 1년치를 끊어놓고도 일주일에.. 더보기
한국 보수주의에 대한 단상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기면, 기본적으로 '보수'적 관점으로 세계를 보게 된다. 여기서 '보수'적이라 함은 내 가족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시점이다. 이런 시점은 가족 구성원 중 아내와 어린 아이가 강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가지 시행착오 속에서 깨닫게 되면서 확고해진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훌륭하더라도 가족을 내팽게 친 사람들(특히 남자)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바로 자기 옆의 약자를 내팽개친 데에 대한 비난이다. 하지만 이러한 '보수주의'는 자기 가족에 전전긍긍하는 사이에, 내 집 밖에 존재하는 약자들에 대한 신경을 꺼버릴 위험성이 있다. 내 집 바깥에는 내 아내보다 더 약하고, 내 아이보다 훨씬 약한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리고 이들을 자력으로 지킬 수 없는 무기력한 남자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더보기
그들의 정체성 사랑예찬저자알랭 바디우 지음출판사길 | 2010-11-30 출간카테고리인문책소개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을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결혼이라는...글쓴이 평점 반동적인 제안은 늘 보호해야 할 것은 "우리들만의 가치"라고 말하며, 유일하게 가능한 정체성으로 여기는 세계화한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틀 안에 우리를 쑤셔넣고자 하는 그런 제안입니다. 반동세력이 주제로 삼는 것은 어떤 현식 속에서건, 아주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정체성에 관련된 주제입니다. 주제가 정체성의 논리로 일관될 때, 사랑은 필연적으로 위협받게 됩니다. 차이를 위해 우리는 이러한 논리의 경향, 그것의 비사회적인 차원과 야만적이고도 경우에 따라 폭력적이기도 한 면면에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안전을 주장하고, 안전하려는 모든 행.. 더보기
강연에 대한 짧은 생각 2년에 걸쳐 번역한 책이 나온지 3 주째에 출판사에서 열어 준 공개 강연에는 다섯 명이 왔다. 나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는데, 같이 작업한 팀장은 초조한 듯 담배를 피우며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대답했다; "미안하기는요, 날이 너무 좋잖아요...이런 날에 누가......" ( 미시마 유키오의 얘기를 들으러 오겠나) 실제로 올 들어 가장 따듯한 날이었다. 오전에 S 대에서 전문가 강연회를 마치고 차 문을 열었을 때 후끈거리는 느낌은 든 것도, 열기를 식히려고 에어컨 스위치를 넣은 것도 올 들어 처음이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서 말하게 된 것도 학위를 받은 후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갑작스럽게 부상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인문 팀장이 열심히 보도자료를 돌렸지만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