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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재즈는 자신 어느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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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about music is like dancing about architecture.

- 마이크 몰라스키, “전후일본의 재즈문화”, 세이도샤, 2006년

이미 “세계작가”로서 명성이 높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하루키 텍스트 속에서 음악이, 그 중에서도 재즈가 독특한 의미 작용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재즈음반 컬럭터로 정평이 나있는 하루키는 “의미가 없으면 스윙이 아니다”라는 재즈에세이를 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재즈는 과연 하루키 작품 세계만의 전매특허이며, 실재로 일본에서 재즈는 하루키의 작품에서처럼 ‘쿨’한 것으로만 이해되고 있을까?

물론 아니다. 하루키가 아직 세상에 대량으로 유통되기 전인 1974년, 일본문학 연구자로서 일본에 유학, 신주쿠의 재즈 다방을 전전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미국인 마이크 몰라스키Michael S. Molasky의 “전후일본의 재즈문화”는, 전후 일본에서 재즈가, 하루키와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지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오에겐자부로, 나카가미 겐지뿐만 아니라, 소설이 아닌 일본영화의 거장인 쿠로사와 아키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의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하루키류의 쿨한 재즈카페의 모습은, 실은 전세대들의 재즈에 대한 치열한 관심과 그 대상에 대한 열정적인 의미화 작용이라는 역사적 수혜 위에 성립된 것임을 놓쳐서는 안되는 셈이다. 실은 일본인들의 재즈에 대한 열정은, 하루키의 팬보다는 재즈팬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테다. 마일즈 데이비스같은 거장의 일본공연 앨범들은 재즈팬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명반 중 하나니까. 그렇다면 왜 일본인들은 그토록 재즈에 열광했을까?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일본의 각기 다른 계층, 각기 다른 세대가 왜, 그리고 어떤 식으로 재즈를 수용해왔는지를 밝히고 있는 이 책은 충분한 관심을 불러일으킬만 하다.

하지만 이 책이 일본의 권위있는 학술상 중 하나인 산토리상을 받은 건, 단순히 본토 재즈를 알고 있는 미국인의 관점에서,미국음악으로서의 재즈가 어떤 식으로 미국과는 다른 문화권인 일본에 제대로 수용되었는가를 엄밀히 실증하고, 근엄한 평가를 내리고있기 때문은 아니다. 엄밀한 실증보다는, 수용과정 속에서 생산된 재즈의 담론 속에 어떠한 것들이 정말로 문제인지를, 문화에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을 적절하게 링크시키면서 드러내고 있는데, 바로 그런 담론분석의 탁월함이 문화 관련 학술서로서 높은 가치를 이끌어낸 주된 요인이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책은 ‘문화분석의 종합선물세트’라고 요약할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그는 소설이나 잡지평론 분석을 통해서, 재즈는 고급문화인가 하급문화인가라는, 문화론의 가장 전통적인 이슈에 대해 일본인들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훑는다. 패전후 1950년대까지의 재즈가 상위 문화로서의 미국문화의 일방향적인 수용이었다면,60년대초 프랑스의 누벨 바그를 통해서 ‘문화’로서의 가치를 확고히 한 재즈는 근엄한 클래식적 전통을 비웃는, 일종의 파괴적인 가치와 자유가 중시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60년대가  개념을 지니지 않는 재즈의 지나친 개념화의 시대였다면, 70년대는 절에서도를 닦는 듯한 “딱딱한 자세”로 숨도 죽인 채로 명반의 한음 한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재즈의 클래식화의 시대라고 할 수있다. 

이런 변화는 일본국내의 정치적 변동의 영향으로 설명가능하지만, 필자는 그보다는 일본의 테크롤로지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다는 점에 보다 주목하고 있는 점이,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일테면 재즈를 향한 도제와 같은 자세는, 수입음반이 아직 귀해 재즈다방에서 숨을 죽이면서 귀한 음반을 듣던 시절의 형태로, 1980년대 고급앰프와 CD 출현으로 인한 음반을 통한 재즈 감상이보편화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CD나 MP3같은 휴대용 재생기의 보급으로 인해, 예를 들면 존 콜트레인의  LP의 앨범자켓이가지고 있었던 독특한 아우라도 사라지게 된 데에 대한 필자는 심한 우려를 표시하는데, 그러나 그건 테크롤로지의 발달이 궁극적으로 재즈의 본질인 라이브와 스윙이라는 일회성이라는 가치, 그리고 관객과의 대화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라는 우려에 비하면 그리심각한 게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건 진정한 재즈라고 할수 없지는 않은가?’ 하는 묘한 반발밤에 휘말리는 순간, 작가와더불어 우리는 오늘날 모든 문화의 영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가장 큰 이슈중의 하나인 근본주의의 문제로 시프트하게 된다. 즉,재즈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이를테면, “진정한 재즈는 스윙이다”라는 말은 그렇다치더라도, “진정한 재즈는 흑인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은 재즈의 역사를 살핀 사람이라면 쉽게 부인하기 힘들며 실제로 이러한 근본주의는 관객측보다는 오히려 창작-연주자를 짖누르는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해 많은일본연주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재즈문화를 어떤 특정 집단의 아이덴티티의 표출의 문제로 본다면, 그건창작연주자에게는 비흑인으로서 재즈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그리고 청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억압의 슬픔을 맞본사람의 슬픔을 ‘감상’, 혹은 ‘음미’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윤리적 문제를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아이덴티티 고민에 너무 깊게 빠져서, 우리는 한 모던 재즈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델로니어스 몽크의 다음과 같은말을 놓쳐서도 곤란하다.  “Jazz and freedom go hand in hand”, 즉 재즈는 곧 ‘자유’라는 말을. 흑인의 억압의 역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처럼, 그들이 재즈를 통해서 표현히고 맛봤던 ‘자유’ 역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확실한 사실이라는 걸,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건 비단 재즈만이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집단의 공동체적 아이덴티티와 자유사이의 긴장이기도 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필자의 지적대로, 관념, 그리고 무한반복의 대상이 되기 이전의 재즈의  ‘소리’는, 정작 자신이 어느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또 누군가의 가슴 속에 들어가 어떤 관념을 낳도록 유혹하는지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고, 특유의 낯설기 그지없는 음역의 세계에서 우리를 손짓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즈를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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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원 신문, 2006년 12월, 걸리버의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