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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방법과 '내 짓' 사이의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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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쓰여진 미로 안에서 헤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다. 
일거에 전체를 볼 수 있는 지도가 제시하는 것은 가짜 미궁에
지나지 않는다. 헤맨다는 것의 희열은 늘 부분밖에 보이지 
않는 것과, 지도가 계속해서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따라서 나는 오히려 도중에 멈춰서 언제까지고 
도착하고 싶지 않다고조차 생각한다. 조금씩조금씩 목적지에 
접근하면서도, 그러나 그곳에 최종적인 도착과 지도의 최종적인
완성을 어디까지고 연기하고 싶다

- 마츠우라 히사키, 방법서설, 고단샤, 2006년


오늘날 인문학은 ‘방법’ 에 신들려 있는 듯하다. 갖가지 방법론에 대한 이해를 위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현장에 이제 막 발을 들여 쩔쩔매고 있는 한 젊은 대학원생을 보다보면, 마치 자신이 정말로 어떤 물고기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로 시간에 떠밀려 출항한 한 소년의 손에, 온갖 종류의 낚시 도구, 최신형 탐사장비,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메뉴얼들이 줄줄이 건내지는 듯한 느낌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방법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물고기인 셈이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방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을까?

데카르트의 이름이 금방 뇌리에 떠오르겠지만, 실은 ‘데카르트 이후’라는 기원설 역시, 방법숭배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훌륭한 “역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데카르트 이전에도 방법은 있었고, 데카르트 이후에도 맨손으로 다랑어를 잡으로 바다로 나간 사람이 있으니까. 오히려 아카데미의 방법에 대한 지나친 숭배는 롤랑 바르트조차 ‘문학의 과학’을 제창했던 시대인, 1960년에서 1970년대에 걸친 일시기의, 일정지역의 영향권 속에 여전히 현재의 학문이 안주하고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굳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 이 책에서, 이제까지 자신의 ‘짓’을 되돌아보고 있는 마츠우라 히사키(松浦壽輝)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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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일반성 속에 작품을 회수하려는 욕망에 일종의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인생의 매우 빠른 시기에 명확하게 깨달았던 것은, 내 짓은 일반화되는 것만을 상대하는 과학과는 전혀 맞닿을 수가 없다는 일점이었다. 결국 나는 결코 일반화될 수 없는 것, 즉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외에는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이 책이, 1982년 “토끼의 댄스”라는 시집으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해, 2000년 “꽃이 썩다”라는 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2005년 “반도”로 요미우리 문학상을 받은 뛰어난 시인이자 소설가로서의 창작론에 지나지 않는다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난 20여년간 아카데미의 한 지점에서 발을 딛고, 수많은 학생들의 연구논문을 읽고 스스로 그림과 영화에 대한 뛰어난 연구서를 내온 중견교수의 관점을 결코 방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카데미가 표방하는 방법(과학, 혹은 이론)과, ‘일반화되지 않는 것’을 ‘일반화되지 않는 것’ 그 자체로 사유하려는 시도(내 짓)와의 근본적인 마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이를테면 월남전을 둘러싼 정치적 언설이 지배했던 1970년대 일본의 마츠우라처럼, 911이후의 오늘날에도 이 세상을 정치적 현장이나 부조리의 지평이 아니라 단지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한 학생이 있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누구의 눈에도 명확하게 지각될 수 있는 그 특출한 ‘미의식’은, 아카데미의 누군가 권위있는 자에 의해 ‘깨끗한 미의식’이라는 조롱을 담은 말로 환원되어 학생의 귀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여전히 농후하다. 그 경우, 그는 아마도 짐을 싸고 걸어나갈지도 모르겠지만, 그 전에 마츠우라 히시키의 다음의 말을 들어보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미의식은 부셔뜨려야 한다는 요청과,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을 더욱 잘 갈고 닦아가겠다는 욱씬거리는 욕망과의 사이에서 연출되는 갈등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회전시켜갈 것인가?” 반대로 말하자면, 마츠우라의 글쓰기는 자신과 아카데미 사이의 놓인 근원적인 차이를 말소하지 않고, 오히려 생산적인 차원으로 회전시켜나가려는 시도의 흔적들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학회를 뜨겁게 달구는 거대담론보다는 눈앞에 놓인 디테일에 눈을 빼앗기는 한 학생도 있을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신체를 둘러싼 두툼한 담론 이전에, 내 시야 바로 코 밑에 내려보이는 어깨에 마음이 빼앗기고, 샤워 후에 송송히 물방울들이 퍼져 있는 그 이미지에서 이 세상 ‘전체’를 발견할 수도 있는 한 학생이. 그에게는 자신의 어깨와 그 곳에 일순 생성된 매우 세부적인 이미지만으로 세상을 횡단해보려는 다양한 시도를 시와 소설이라는 글쓰기를 통해 실천하려는 마츠우라의 짓-굳이 아카데미 용어로 환원하자면, 테마틱이라고 할수 있으리라-이, 신체를 둘러싸고 신체보다 더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푸코나 들뢰즈, 지젝의 ‘방법’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마츠우라 히사키의 ‘짓’은, 고군분투 끝에 아카데미 안에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윤리들이라는 문제의 지평을 연 데리다-낭시의 사유군들에 편입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기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아카데미의 문제군에 끝내 회수되지 않고, 아무에게도 증여되지 않는 채 영원히 그 만의 ‘짓’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두가지 선택지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취해야할 것인가? 하지만 자뭇 투명하게 보이는 양자택일의 선택지 앞에서 조건반사적인 선택과 해결의 오류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마츠우라의 가장 근원적인 ‘내 짓’의 원리인, ‘미아의 감각’, 즉 헤맨다는 것의 불안과 쾌락으로 다시 돌아와 방법을 비춰볼 필요가 있다.

“종이에 쓰여진 미로 안에서 헤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다. 일거에 전체를 볼 수 있는 지도가 제시하는 것은 가짜 미궁에 지나지 않는다. 헤맨다는 것의 희열은 늘 부분밖에 보이지 않는 것과, 지도가 계속해서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따라서 나는 오히려 도중에 멈춰서 언제까지고 도착하고 싶지 않다고조차 생각한다. 조금씩조금씩 목적지에 접근하면서도, 그러나 그곳에 최종적인 도착과 지도의 최종적인 완성을 어디까지고 연기하고 싶다”

방법과 내짓의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완성된 지도와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 사이의 차이일 것이
다. 분명 완성된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난다면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로는 처음보는 길을 헤맬 때의 느끼는 불안과 초조, 혹은, 그 길의 불가해한 디테일들의 느낌, 나아가 내가 걷는 길이 곧 지도가 된다는 것을 실감할 때 느끼는 쾌감을 쉽게 손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연세대학원 신문, 2006년 6월 5일, 걸리버의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