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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히데오 만나기2

 

1.

 

지난 주말에 보스턴에 다녀왔다, 히데오를 만나러. 

 

7년 전 도쿄의 키지조지에서 만난 이후로 그와는 종종 메일을 주고받았다. 메일이 올 때마다 그의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의 이혼과 오사카로의 이동. 새로운 파트너가 생길 때마다 바뀌는 성(姓). 새신부와 한국에 오겠다고 했지만 번번히 무산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온 메일에는 미국 여성과 만나서 결혼을 할 예정이며, 그녀와 보스턴으로 갈 생각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아는 히데오와 현실의 히데오의 간극이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히데오가 그러는 사이에 나는 늘 똑같은 연구실과 강의실, 그리고 집을 오갔다. 더러 교내, 혹은 외부 회의에서도 참석했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는 일은 없다. 나는 대학 내외의 파워 게임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눈동자를 불태우며 불나방처럼 게임 판에 뛰어드는 것을 보며 정년 심사를 구실로 ‘힘’과 관련된 모든 일들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와인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정년 심사를 통과한 후 반년짜리 연구 학기를 받아 9월에 미국에 혼자 오게 되었다. 뉴욕주의 시골 마을에 위치한 대학으로, 자랑할 거라고는 도서관과 호수와 폭포 정도. 기후 변화로 인해 이 지역에 와인 재배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라,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와이너리를 돌아다닐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토록 푸르던 신록이 형형색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어느날은 군데군데 빨갛게 불타오르고, 바람에 단풍잎을 내주면서 가을의 절정도 지나갔다.

 

낙엽이 깔린 주위를 보면서 할일이 없어진 나는 히데오를 떠올렸고, 혹시 지금 보스턴에 있는지 물어보는 메일을 보냈다. 금방 답신이 왔다. 보스턴 캠브리지에서 아내와 함께 살면서 로스쿨을 다니고 있다고. 만나기로 했다.

 

2.

 

보스턴까지는 차로 약 6시간이 걸렸다. 메사추세츠로 가는 도중에 담배를 피고 피자 등으로 끼니를 떼우던 시간을 빼고는 온전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운전에 집중하면 잊혀졌던, 혹은 잊혀질 수 없는 과거와 만나는 일이 정말 많았는데, 최근에는 과거가 애써 힘을 써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영역으로 물러나 있었다. 현재의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끊임없이 반추해야 했던 시기도 어느덧 지나가고, 이제는 아무런 맥락이 없어도 그냥 존재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나 역시 그렇게 그 일부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고나 할까.

 

해가 떨어질 때 즈음 보스턴에 도착해 미리 예약해놓은 Airbnb에 도착해 짐을 풀고, 주변을 검색해 태국 요리집을 찾아가 끼니를 해결한 후, 숙소로 돌아와 집에서 가져온 먹다남은 와인을 마시며 책을 좀 읽다가 잠들었다. 

 

3.

 

히데오와는 1시에 보스턴 미술관 앞에서 보기로 했다. 그와 미술관 같은 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처음이어서 어떨까 싶었는데, 그는 자신에게 동반자 한명을 무료로 입장시킬 수 있는 멤버십이 있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그가 왜 미술관 멤버십을 가지고 있는지 조금 궁금해졌지만, 그건 만나서 묻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한 히데오는 지난 번 일본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얼굴에서 명실상부한 중년의 느낌이 물씬 묻어났다. 그 세월의 흔적에 조금 당황해하면서 짧고 빠른 인사를 나눈 후 멤버십 출입구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미술관으로 들어갔고, 그는 나를 살바도로 달리 섹션으로 인도했다.

 

토요일 오후의 미술관은 사람들로 붐벼서 우리는 그 인파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그가 나즈막히 학부 시절의 주변 녀석들은 웬지 모두들 달리를 좋아했었다고 일본어로 말했다. 그랬던가, 너는 늘 클래식만을 듣지 않았나. 우리는 달리의 중요한 그림들을 성큼성큼 지나가면서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보스턴에 온다고는 했지만 진짜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언제 온거냐고, 로스쿨은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1월에 신부와 함께 왔고, 수업은 2개만 들으면 되어서 큰 부담이 없다고 했다. 변호사 시험도 일본보다는 쉬워서 부담이 덜 하다고. 멤버십은 왜 가지고 있는 거냐 물으니, 신부의 남동생이 선물로 줬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의 동정을 확인하면서 달리 전을 패스한 후에 자포니즘 관련 후기 인상파 그림들이 있는 섹션으로 접어들었다. 내가 수업 시간에 다루는 마네의 그림을 보면서 짧게 코멘트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 보스톤 미술관과 관련된 이런저런 학술적 논의들이 스쳐지나갔지만, 굳이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빠르게, 고흐, 모네, 뭉크를 지나 서전트를 보고, 마지막으로 일본 미술 전시관에 들린 후 바깥으로 나갔다.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만추에 접어든 보스턴의 거리는 한산했고, 우리들에게 시간은 넉넉히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파졌다면서 그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푸드 마켓으로 나를 인도했고, 거기서 각자의 라면과 맥주를 주문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4

 

라면으로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랬을 때, 나는 설마 히데오가 정말로 보스턴에 올 줄은 몰랐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메일을 받을 때마다 사실 좀 불안불안했다고.

 

히데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은 쭉 잘 도망다녔고, 지금도 도망다니고 있다고 했다. 한 여자에서 다른 여자로, 이 회사에서 저 회사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말이지. 아사다 아키라의 들뢰즈론처럼? 그래, 나 아사다 아키라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그래 잘 도망가는 것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좋은 인생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들, 그러니까 기억으로부터도 도망갈 수 있을까. 그러니까 25년 전에 너는 정말로 진지하게 철학자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고, 실제로 철학과 대학원 진학에 실패했을 때 내게 보내온 메일은 매우 다크했잖아. 

 

히데오는 자신이 그런 메일을 보냈다는 것이 기억이 없는 듯 당황해했지만, 지난 시절의 ‘흙역사’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긴 그도 어느덧 오십이었다. 나는 히데오처럼 분명히 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사람이 다른 길을 가고, 나처럼 그렇다 할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이 대학에 있는 아이러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는 이제와서 생각하기에 자신이 떨어진 것은 당연했다고, 자신은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대학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 같은 사람’이 대체 뭔지 나는 여전히 감을 잡을 수 없었는데, 그것을 찾는 실마리라도 잡아볼 셈으로 나는 준비된 질문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히데오, 너는 왜 나를 만나니? 

 

실은 많이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히데오는 조금 당황해하면서 말했다. 사실 그 시절의 내 자신이 어땠는지 잘 모르겠어. 아까 네가 말했던 편지 기억도 나지 않고. 그런데 오히려 네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 대해서 알고 있잖아. 그걸 찾고 싶기도 하고. 

 

대답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계속 도망가는 히데오가 왜 그 시절의 기억으로부터는 도망가려고 하지 않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와 싸우려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5.

 

우리는 북적거리는 푸드 마켓에서 나왔고, 히데오는 날 자신이 다니는 학교로 인도했다. 거기서도 한눈에 봐도 화려하게 보이는 높은 건물이 로스쿨이었다. 토요일 1층에서는 리셉션이 벌어지고 있어서, 우리는 뒷문으로 들어가 높은 층으로 올라가 찰스 리버가 보이는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창문 바깥으로 펼쳐지는 보스턴의 고층빌딩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7년 전에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학원 진학에 실패한 이후부터 우리가 다시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를. 진학에 실패한 이후 그는 겨우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로스쿨(별로 유명하지 않아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을 찾아 들어갔고 졸업 후 바로 대기업 법무 지원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하청 일 같은 것을 하다가 어쩌다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고 주위에 인정받기 시작해 본부장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되었다고. 그러니까 7년전 나와 만났을 무렵이 처음으로 인생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였다고.

 

그때부터는 그저 ‘흐름’에 맡기고 있다고 했다. 대기업에서 나와 독립한 후 오사카에서 법률 계약서를 처리해주는 벤처를 창립하고, 거기서 술을 좋아하는 지금의 아내와 만나서 여기에 오게 되기까지는 모두 일종의 ‘흐름’이였다고. 그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인정받아서, 지금도 자신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이 있다고. 다만 미국에 오는 데 돈이 많이 들어 저금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을 빼면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주변이 어두워졌을 때, 히데오는 실은 자신이 법과 잘 맞는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6.

 

우리는 학교에서 나와 트레인을 타고 하버드 스퀘어로 이동해서 한잔 더 하기로 했다. 보스턴의 대중 교통은 뉴욕과 마찬가지로 신용카드를 터치하면 되었는데, 트레인에서 내릴 때 히데오는 자신은 찍는 척만 했을 뿐 실은 찍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미국 생활에 잘 녹아들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 그가 잘 아는 곳은 자리가 없어서 빙글빙글 돌다가 그냥 주변에 있는 바&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카운터에 자리를 잡자 그는 마티니를, 나는 시라즈를 시켜 마시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컸고, 취기도 돌아서 우리가 그곳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히데오가 여전히 아이를 갖기 두려워하는 반면, 자신의 스타업 회사의 성장에는 자신감을 갖고 있으며, 지금 하는 일은 최종적으로는 음식점을 내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난다. 미국에 오기 전에 진지하게 요리 학원을 다녔다는 말을 했던 것을 보면, 음식점을 내고 싶다는 말은 허언은 아닌 것 같았다. 미국에 정착할지, 일본으로 돌아갈지도 미정이라고. 하지만 열심히 도망가는 히데오로부터 어쩐지 전과 같은 불안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불안한 것은 내 쪽이었다. 나야말로 은퇴 후에 무엇을 할지 정해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솔직히 막막하기도 하다. 여행? 전원주택? 서점? 몇년전부터 예전에 꿈꿨던 욕망이 사그러 든 반면, 이를 대체할 새로운 욕망은 생기지 않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체되어 있음을, 말이다. 그러한 정체를 요새 젊은이들은 ‘고인 물’로 부르는 데, 딱 정확한 표현 아닐까 싶다. 특히 ‘흐름’ 속에 있는 히데오 옆에 있으니, 내 고임의 정도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취기 때문인지 한편으로는 인생에서는 이 정체의 시간도 하나의 ‘흐름’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틈엔가 내 눈이 풀려가는 것을 알았는지, 히데오가 먼저 많이 마셨다면서 가자고 하면서 종업원에게 반반으로 끊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신용카드를 내고, 받은 종이에 10달러의 팁을 적고는 일어났다.

 

헤어질 무렵 히데오는 다음날 내 일정을 물어보면서 상황 봐서 아내와 함께 볼 수 있으면 보자고 했고, 나는 그러면 좋겠다고 대답하지만 내심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7

 

다음날 나는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차를 몰아 보스턴 해변에 갔다. 시즌이 지난 바닷가에는 개들을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갈 뿐 한적했다. 새파란 하늘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비행기들이 나타났다가 고도를 낮추며 공항 쪽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히데오에게 이제 돌아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바다를 봤다.

 

고인다는 말도, 흘러간다는 말도 해당되지 않는 저 넓고 넓은 바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