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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역사적 국가에 대한 망각적 소비

카야마 리카『프티 내셔널리즘 증후군』 中公新書, 2002
후지와라 마사히코『국가의 품격』新潮新書, 2005
아베신조『아름다운 나라로』文春新書, 2006
강상중 『애국의 작법』朝日新書, 2006

최근 일본에서는 다양한 내셔널리즘 담론이 눈에 띈다. 최근에는 아베신조의『아름다운 나라로』(2006)나 후지와라 마사히코의『국가의 품격』(2005)이 화제가 되었다. 그런 책에는 바람직한 내셔널리즘의 이미지가 각각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팽창되는 내셔널리즘 담론의 장을 지탱하는 것은, 사회의 다양한 장소에서 눈에 띄는, 보다 비속한 내셔널리즘적 현상에 다름아니다. 예를 들면 축구 경기장에서 일장기를 페인팅한 젊은이들의 모습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카야마 리카는 그런 사람들을「프티 내셔널리스트」(『프티 내셔널리즘 증후군』(2002))이라 부른다. 일본을 거의 천전난만하게 긍정하는, 이러한 사람들의 행동에 지탱되며, 현대일본의 내셔널리즘 담론은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일본에서는 현재, 내셔널리즘이 팽창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는 냉전 이후의 동아시아의 불안정화를 배경으로 들수 있다. 버블 붕괴 이후, 일본경제의 안정성의 신화가 붕괴되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과 중국문화를 접하게 되는 가운데,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문화적・경제적・정치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내셔널리즘의 유행은 글로버리즘의 진행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내셔널리즘이 일종의 원한(르상티망ressentiment)의 현상으로 존재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원래 근대의 국민국가는 권력을 부정하는 특수한 권력으로서의 측면이 강하다. 전제국가나 귀족들을 타도하고 부정하는, 그러한 특수한 권력으로서 국민국가가 기대되었던 것이다. 현대일본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면 작년 일본에서는「격차사회」라는 말이 유행했다. 실체는 어떻든,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는 격차가 해소되기 힘든 형태로 침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사회를 만든 권력을 해체하는 힘으로서 내셔널리즘은 받아들이기 쉬운 측면이 있다. 실제로 코이즈미 준이치로 전총리가 그토록 많은 인기를 얻은 것은, 일본에 만연하는 권력을 ‘부수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상황적 불안정화와 국내적 불만만에 의해, 현대일본의 내셔널리즘의 발흥을 다 파악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타입의 내셔널리즘에 의해 지탱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먼저 이 내셔널리즘의 변질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전후일본은 내셔널리즘, 혹은 오히려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말하는 것 그 자체를 타입화하는 점에서 특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타입의 존재는 필경 내셔널리즘이 많은 질문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문제의 자장을 전후 일본에 형성하고 있었던 점에 기인하고 있으리라.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거듭되는 많은 사람의 죽음, 미국의 지배, 배신이나 기만등 대답하기 힘든 문제에 대한 응답을 전후일본에 요구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람들은 내셔널리즘을 정면에서 논쟁할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즉 현재 내셔널리즘의 첫번째 특징은, 그것이 일종의 합리적 토론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베신조의『아름다운 나라로』가 그 전형이 된다. 선정적인 제목-왜 일본이 아름다운가는 마지막까지 드러나지 않지만-과는 반대로, 이 책에서 얘기되는 것은 현재 세계의 정치정세 속에서는, 일본 역시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단순한「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찍이 내셔널리즘이란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 즉 생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합리적인 토론을 초월한 곳에서 처음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이러한 부조리의 측면을 표면부터 도려냈고, 그 때문에 왜소화된 것이다. 그들은 국가를 목숨을 걸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해의 합리적 계산을 전제로 해서, 내셔널리즘을 지지할 것을 설파하고 있다.

이러한 ‘합리성’에 근거한 현대 내서널리즘 담론은, 둘째로 국가를 옹호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내셔널리즘에 천진난만하게 찬성하는 담론만은 아니다.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논의에서도, 국가의 존재는 부정하기 힘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강상중의 『애국의 작법』(2006)에서는, 「애국심」의 인공성이나「부자연스러움」이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국가를, 보다 타민족에 열려진 것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합리적이며, 또 현존하는 국가를 전제한 현재긍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내셔널리즘론이 전제하는 이「현실」이란 뭘까? 그것은「소비사회」라는 현실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내셔널리즘은 사회의 풍요로움과 안전과 행복을 칭하는 형식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를 낳는 것이, 무엇보다「소비사회」라는 현실이다. 따라서 현대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들에게 안정과 풍요함을 가져다주는「소비사회」라는 사회성의 장을 부정하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소비사회」가 담보하는 이 자명성에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달리 말하면 내셔널리즘은, 「소비사회」가 만드는「현상」을 긍정하는 것으로, 그「현상」이, 역사 속에서 떠오르는, 부정가능한 하나의「현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시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역사를 망각하는 것 없이 국가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단 말인가? 20세기의 역사를 보는 한, 국가가 일으킨, 그리고 일으키고 있는, 비참한 사건의 총량은 국가를 긍정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무겁다고 할 수밖에 없다. 즉, 20세기의 역사를 긍정할 때, 국가란 무엇보다도「적」을 만들고, 그것과 싸우기 위한 상상력을 기르는 장치로 기능했다는 걸 부정하긴 힘들다.

 그러나「소비사회」는 국가가 뿌리내린 이러한 역사적 공간에 대해서 망각시켜버린다. 그것은 말하자면 끊임없이「현재」를 긍정하는 것으로 재생산되는, 사회적 망각의 시스템 형식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 시스템이 만드는「현재」의 자명성에 근거해, 전후일본의 내셔널리즘 담론에 대한 금기도 상대화되어 온 셈이다. 

이에 대해 우리들은 국가를 인간의 역사 속에 자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상상력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복지국가」로서의「커다란 국가」나 자유주의적「작은 국가」, 혹은 또 헌법을 개정해「합리적」인 나라가 된 일본의 모습등, 다양한 국가의 이미지를 이상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이상화한 사상의 가치는 극히 제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국가를 전제한 사고는 소비사회 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모드로서 소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들은, 국가가 소실되는 세계에 대한 이념을 늘 사고 속에 열어두고, 그 이념에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가를, 현실의 선택의 지침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현대에 국가가 필요하다는 건 자명하다. 그러나 그러한「현실」을 상대화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소비사회 속에서 지(知)를 독자의 것으로 성립하기 위한 근본조건을 구성하고, 지의 고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저자 사다카네 히데유키 貞包英之   hidesadakane@hotmail.com   쿄리츠 여대 강사, 인디미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