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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반미주의 : anti-Americanism





■ 성장지상주의가 낳는 폐해를 비롯해, 결함과 모순을 안고 있는 자본주의와 잘 해보려는 노력 속에서,
바람직한 자본주의 제도 찾기는, 결국 윤리성의 문제에 직면한다. 그 윤리성을 둘러싸고, 반미주의
라는 형태로 자기 정체성 찾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 시장 원리주의가 선전되어 온, 탐욕의 10년이라고 불리워진 80년대 후, 그러니까 90년대에는 선진국
중에서는 감속생활, 슬로우 라이프, 저소비생활을 외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라이프 스타일 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ninablility의  앞문자만을
딴 '로하스-LOHAS'란 표어가 탄생했다. 유기농업이나 태양열이용등의 친환경 라이프 스타일,
자기개발, 자연의료등의 추천이다. 이러한 운동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 추천되고 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청빈이든 저소비생활이든, 로하스든, 이것을
외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유가 있고, 따라서 그런 주장은 그런 상황 속에서의
반성이라는 측면이 농후하다
. 빈곤자나 소득격차로 고민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발신되고 있지 않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빈곤자에게 그것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 욕망을 봉인하지 않고, 그 자유의 폭주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이것은 자본주의의 윤리성의 문제다.
사익추구에 의해 성립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에는, 회사 경영자나 주주의 사회적 책임, 개개인의
과승소비, 욕망의 억압이라는 개인의 윤리성을 설파함과 동시에, 사욕추구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뒤틀림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회적 시스템에 의한 윤리성의 보장이 불가결하다. 글로벌화 시대에 있어서,
다양한 자본주의 제도의 충돌은, 이 윤리성의 보장을 둘러싼 충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콘도 켄, 반미주의, 2008년





부시정권시, 전세계적으로 번졌던, 반미, 혹은 반미주의는 도대체 어떤 운동이며 어떤 주의일까?

반미, 반미주의를,  이미 망한 공산주의나, 철지난 민족주의, 혹은 꿈만 꾸는 비실용주의라는 식으로 쉽게 환원하려는 오늘날, 그것을 자국의 정체성 찾기를 위한 표현 양식으로서 보는 저자의 시점은 무척 소중하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더더욱. 반미, 혹은 반미주의를 통해서,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어떤 미국)에 반대하고자 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들이 제시되어 있었지만, "미국" 그 자체보다는, 클린턴 정부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그에 변승하는 문화가, 자국의 지배적인 문화가 되는 데에 대한 반발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일테면 2008년의 "촛불"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정부에서는 여전히 2008년의 촛불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엉뚱한 짓을 하고 있지만, 실은 밖에 봤을 때 그것은, "신자유주의"(FTA)와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비춰진다. 신자유주의=성장지상주의의 전폭적인 수혜를 받은 각료들로 구성되어 있는 정권에서는, 자신들의 신념이 틀렸을 수도 있는 생각을 한번도 할 수 없기에, 촛불은 정말로 엉뚱하며, 정치적 조작극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신자유주의의 기본적인 전제인, 선택권이 보장 되어 있는데, 즉 안사먹으면 그만인데, 왜 그토록 반대를 하는지, 그들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선택권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삶들의 존재와 그 책임에 대해서.

그걸 이해못한 채로, 촛불이 켜지는 동안 성장이 멈추고, 성장이 멈추면 국가경쟁력이 그 만큼 떨어진다는 자동화된 도식속에서, 그들은 초조할 뿐이다. 이런 사고 패턴은 정부를 탄생시킨 지지자들의 생각과도 겹쳐진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이 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냉전의 틀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비판하곤 하지만, 사실 지지자들의 머릿속에는 자유민주주의보다도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가득하다. 압도적인 성장은 결국 분배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거라는 신념, 이건 고도성장의 룰모델로 실제로 1950-80년대 일본과 독일의 경우는 가능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 고도성장이 가능한가? 
 
왜 불가능하냐고, 정부 쪽 사람들은 두바이를 보라고, 아니면 중국, 인도, 브라질 쪽을 보라고 한다. 우리는 하면 할수 있다고. 왜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하냐고 한다. 그말을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늘날의 고도성장이 분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을 하면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분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실은 성장 뿐이라는 걸 역사가 증명하지 않냐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도 결국 결론은 성장 뿐인 셈이다. 이쯤되면 그야말로 (성장을 멈춘) "양철북"이다.  
 
하지만 참담한 것은, 우리가 양철북을 두드리는데 답답해하면서도, 실은 기대도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90년대 영종도에 공항을 짓겠다는 황당한 말에, 누가 거기까지 가서 비행기를 타느냐고 황당해하던 사람들도, 국가안보상 위험하다고 반대하던 사람들도, 공항이 들어서자마자 다들 좋아했고, 심지어는 비행기도 안타는데 드라이브 하러 가고, 청계천이 복개하자 시골에서 관광하러 왔다. 삽질과 아파트를 욕하지만, 삽질이 끝났을 때의 직면한 세상에 다들 만족했고 과거를 잊었다. 

그렇게 결국 국가는 성장하고 미국산 소고기를 먹고 미드를 보면서 지내는 내 삶도, 분명 나아진 것도 같은데, 한편으로는 자신은 전혀 성장하지 않고 부족하다는 느낌은 왜 그렇게 점점 또렷해지는 것일까? 매일매일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선택하고 있는데, 실은 전혀 선택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