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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국토'를 통과하는 통로(Passage)

—우찌다 류죠 “국토론”(치쿠마 쇼보, 2002)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사고 왜소화의 시대이다. 철학이나 문학 분야에서, 일찍이 기존의 지(知)에 막기 힘든 구멍을 내왔던 사고가 상대화되고, 폐기된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은 분명 ‘소비사회’의 침윤이다. 예전의 문제제기는 유행이나 네트웍 속의 자질구레한 대화로 소비되고 만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사고의 왜소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20세기에 있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통과해온 역사의 무게 아닐까? 상대화하기 힘든 그 ‘무게’를 참아내지 못하고, 사람들을 20세기를 회피한다. 그 결과 사고도 왜소화된다. 현대의 사고는 대량생산이나 대량소비, 또 과중한 전쟁의 역사로서의 20세기를 모태로 삼아, 그곳에서의 인간존재나 사회의 근본적인 흔들림 속에서 현상했 왔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대 사회학에서는 그럴 것이다. 현대사회학은 루만이나 기덴즈처럼 시스템의 자기준거・재귀성 속에서 사회를 파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론은, 예를 들면 미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개방했던 인간, 혹은 사회의 정처없는 무근거성을 폐기하고,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합리성의 동일성을 신봉한다. 한편으로 사회학은 현재, 구축주의, 역사사회학으로 기울어지고도 있다. 이 경우, 사회의 존재는 그것을 구성하는 역사(주의) 속에서 해체된다. 역사란 무엇인가?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은, 구축주의나 역사사회학이, 역사를 구성해 그것을 발생시키는 장소로써의 사회를, 오히려 역사에 의해서 구성되는 대상으로 환원시켜버렸다는 사실이다.

본서 “국토론”은, 그러한 왜소론에 굴하지 않고, 사람들이 반복해서 살며 죽어가는 장소로서의 사회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는 실체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비판이나 역사구축주의를 손쉽게 계승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장소로서, 정치나 역사를 분절하는 근거의 심연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본서의 저자 우찌다 류죠(内田隆三)는, 이러한 사건의 장소로서의 사회의 모습을 소비사회론적 시점으로 분석해왔다(“소비사회와 권력”). 현대사회는 맑시즘적인 계급론이나 푸코적인 권력론에 의해 파악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그러한 권력을 분석하고, 소거해가는 소비사회의 개별적인 논리야말로 적절하게 분석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느 곳에서나 균질한 ‘소비사회’의 시스템적 측면은 아니다. 각각의 사회는 고유의 융기와 함몰을 지니며, 이 독자적인 포치(布置constellation)야말로 각각의 국부에 ‘소비사회’적 시스템의 발생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일본사회의 이러한 독자의 포치가 본서의 분석대상이 된다. 일정한 시간적 규모 속에서 근대일본사회에 유지된 이 배치가 ‘국토’라고 불린다. ‘국토’란 ‘일본’을 전체화하고, 그곳에서 살고 죽는 것을 숙명화하는 것으로, 분명 하나의 환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도 빠져나가기 힘든 환상이기도 하다. 거듭해서 사람들을 살고 죽게 하는 것으로, 이 환상은 집단으로서의 사람들의 존재를 구속하기 때문이다. 본서 “국토론”은, 이러한 ‘국토’라는 환상에 구속된 일본사회의 100년의 실상을 조명한다. 

대역사건(역주, 반천황운동), 패전, 고도성장, 뉴타운의 성립, 버믈의 성장등의 사건, 또 사토 하루오, 사카구치 안고, 미시마 유키오, 그리고 히로히토 천황등의 인물이 다뤄진다. 이러한 분석의 대상은 폭넓지만, 무질서하게 배열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사건과 인물들, 그 관계의 배후에는 먼저 ‘천황’이라는 존재가 숨어있다. 여기서 천황이란, 고립된 ‘주체’로서 대상화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각각의 사건과 인물들의 배열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천황이란 파편화된 사상(事象)을 함께 살아온 것으로 배치하는 근대일본 특유의 장소(場 topos)인 셈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다뤄진 사건-인물의 배후에 떠오르는 것은 자본이라는 미지의 힘의 대두이다. 그것은 근대일본에 침투해, 사람들의 생활과 가치관, 혹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의 윤곽조차도 변형시켜간다. 자본과 천황이라는,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상호보완하는 힘의 길항 속에, 바로 ‘국토’라는 환상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한 힘이 자기 무근거성을 참지 못하고, 동일성의 신화 속에서 잠들려고 할 때, ‘국토’라는 일본사회를 전체화하는, 어떤 숙명의 환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본서가 밝히는 것은, 그러나 근대일본의 이러한 역사적 깊이만은 아니다. 본서가 끄집어내는 것은 ‘국토’라는 환상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고독한 장소(Locus Solus)로 남겨진 현대일본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차별적 살인사건을 일으킨 소년A, 소비사회 속에 자연이 우화(allegory)화 된 아리아키 만의 간척사업, 낮에는 상장기업에서 일하면서도 밤에는 매춘부가 된 더블 페이스의 여자등, 버블 붕괴 후부터 1997년까지 일본각지에서 발생한 사건이 분석된다. 그 배후에 투명하게 보이는 것은, 사람이나 자연이 살고 죽는 숙명을 상대화하는 사회의 특이한 모습이다. ‘국토’라는 거대한 환상은 단순히 증발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본사회가 100년 동안 계속해서 꿔왔던 꿈의 대가로서, 이 장소에서는 온갖 꿈의 흔적이 남겨지고, 그 파편의 축적이 사람들의 생사의 동일성을 끝없이 흔드는 하나의 폐허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분명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본서가 주제로 삼는 것은, 갖은 사건이 각각 성립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계승해가는데 있어서, 오히려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구도이다. 따라서 우선 일본사회에 ‘국토’라는 환상과 함께 부여받은 이 우연의 운명에 대해서 진중하게 바라봐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한국, 또 다른 나라에서 사람들이 집단으로 잠들고 있었던 20세기의 꿈의 배치에 대해서 되물어보자. 근대일본의 ‘국토’라는 환상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본서의 주제는 한정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이 ‘국토’란 동아시아의 어떤 일정 집단이 통과해나간 하나의 통로(Passage)이며, 또 자본이라는 보다 거대한 힘을 매개로 하는 변수이다. 그렇다면, 이 ‘국토’를 기술하고 있는 본서 그 자체가, 20세기, 혹은 세계의 현재를 사고하기 위한 상상력의 통로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수 있으리라.

쿄리쯔 여자대학 강사
사다카네 히데유키(貞包英之)- 인디미나 역

연세대학원 신문, 2006년 4월 3일, 걸리버의 시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