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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老眼



예전 같으면 저녁 10시부터 초롱초롱해지던 눈이, 갑자기 침침해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아침인 경우가 빈번해졌다. 노안이 찾아온 것도 그 때 즈음이었다. 

 그 전 해였던가, 출석부를 보다가 갑자기 글자가 안 보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경을 들기 시작했다던 S의 말을 들을 때만 하더라도 그저 웃어넘겼는데, 어느 틈에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물론 변명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작년 여름부터 자야하는 아이를 위해서 일찌감치 집안을 껌껌하게 해놓고 kindle로 글을 읽곤 했던 것이 치명타였던 것 같다. 껌껌한 밤에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는 것은 나름 즐거웠으나 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눈이 침침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스마트기기를 레티나 디스플레이 등으로 바꿔보거나, 눈에 좋다는 약을 먹고, 밤에는 아예 활자를 멀리하곤 했지만, 한번 찾아온 노안은 다시 뒤돌아가는 일이 없다.   

  노안이 주는 메시지는, 너무 많이 읽었다가 아니라,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이다. 눈동자는 더이상 반짝거리지 않고, 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폰지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정보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소진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안의 도래와 함께 새벽까지 빈둥거리던 올빼미의 생활도 자연스럽게 청산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어느 순간 눈이 감기고, 일어나보면 아침이다. 피곤하면 피곤한 대로,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대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날들이 그야말로 꿈처럼 멀리 느껴진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일수록 강하게 중년을 실감한다. 허나 그러한 실감은 어쩌다 잠이 오지 않는 날에, 이 간만의 여유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공회전하고 마는 나를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로 찾아온다. " 이 시간에 또 무엇을 본단 말인가, 또 어디로 나간단 말인가? " 중얼거리며 소파에 앉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대다가는, 결국 예전에 봤던 영화를 한번 더 보는 내 모습은 칠순의 아버지가 하는 모습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중년이 되었다는 것이 그저 마냥 서럽고 슬프다는 건 아니다. 육체적 퇴화로 인해 줄어드는 욕망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 평온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유지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갑자기 누군가와 뜨겁게 바람을 핀다던지, 모든 것이 끝장날 줄 알면서도(?) 젊은이의 몸을 탐닉하는 행위 같은 것이 있다 치자. 이런 '가십'을 내 중년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려 한다. 


  (1) 그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퇴화를 알리는 경보에 놀랐던 것일지도, 그래서 "살아있음"을 굳이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2) 마치 처서가 찾아오기 직전의 매미처럼, 거의 무의식적으로 생물학적 본능에 충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3) 혹은, 죽음이란 새벽녘에 갑자기 찾아드는 오한처럼 극도로 서늘한 것이며, 그 앞에 생의 그 어떤 인내도 끝내 보상받지 못한다고 확신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나아가 (4) 어쩌면 이번 생은 이미 망했고 그렇다면....

 

  하지만 어떤 사태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실은 중년의 나이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중년의 문제는, 이러한 조악한 이해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평온을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데 있다.  


 감정의 혼란을 회피하는 이러한 자세 속에, 이미 젊음이 가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