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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 일본

사라진 선생님들은 어떻게 귀환하는가

1.학교와 폭력


일본의 문화콘텐츠 속에 학교는 어떠한 모습일까?


영화 <Love letter><스윙걸스>, 혹은 만화 슬램덩크로 대표되는 청소년기의 풋풋하고 낯간지러운 사랑과 훈훈한 우정으로 가득 차 있는 학교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틀 로열>이나 <고백>에서 보듯이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잡담을 하거나, 대들고 주먹다짐을 벌이다가 마침내 칼을 휘두르는, 살벌한 풍경의 학교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그럼 어느 쪽이 리얼에 가까울까?


양 쪽 모두 허구로 구축된 세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양쪽의 허구는 모두 어느 정도의 사실에 기반을 둔 것임도 놓쳐서는 곤란하다. 그러니까 사랑과 폭력은 어떤 리얼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허구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리얼은 어떠한 모습일까?


학교의 리얼한 모습은 아마도 모두가 아는 한국의 교실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재미있는 소소한 일상이 반복되는 세계. 더러는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며, 더러는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더러는 그저 한없이 유치하기만 한 일상의 풍경들은 굳이 일본이라고 해도 다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학교라는 공간이야말로 급변하는 세상에서 그 변화의 영향을 가장 덜 받는 곳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1969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쇼지 카오루의 빨간 두건 아가씨, 몸조심 해속의 일본 고등학교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도쿄대 진학을 준비하던 카오루군의 눈에 비친 명문 히비야 고등학교는 도쿄 전체가 이른바 대학생들의 폭력시위로 얼룩져 마침내 도쿄대가 신입생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는데도, 서로 싱긋싱긋 웃어대며 클럽활동도 학생회활동도 계속되는 이상한 곳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에서 학교는 폭력적인 세상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교실 벽에 붙어 있는 시간표를 어떻게든 지키려는 폐쇄적인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시간표는 실은 예컨대 누군가 한줌의 학생이 공부해야하니까요라고 태연히 학생총회를 결석한다면 그것으로 끝장일 게 분명할 만큼 구속력이 약하다. , 카오루의 말처럼 클럽활동이나 학생회활동 등은 입시전쟁이라는 적나라한 현실을 감추는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 카오루에 따르자면 학교야말로 적자생존 혹은 무한경쟁이라는 세상의 원리부터 결코 자유로운 적이 없었으며, 동시에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을 적절하게 감추는 베일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곳이다. 교실 창가에 팔랑거리는 커튼부터 고시엔과 브라스밴드까지, 일본에서 학교야말로 가장무도회의 가장 적절한 소품들을 완비하고 있는 곳은 아닌가?


2. 선생님이 사라진 교실


실은 일본의 중등교육이 입신출세의 발판이 되는 학벌을 형성하기 위한 예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여러 문학 작품 속에서 지적되어 왔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에 번번히 실패한 나가이 가후 스스로의 인생이 녹아들어가 있는 스미다강은 그 대표작이다.


하지만 입신출세가 결국 일부에게 제한될 수밖에 있는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학교의 기능은 실은 국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국민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었다. 그러니까 학교는 체벌이나 기합 등의 폭력을 통해서 국가가 원하는 방식대로 학생들을 훈육해왔고, 이에 굴복하지 않는 청소년들을 퇴학 등을 통해 배제시켰다. 학교 졸업장은 국가가 원하는 조건, 즉 국가의 폭력을 감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가 요청하는 대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일정 부분 클리어했음을 입증하는 자격증 같은 것이었다. 예컨대 교련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폭력을 내면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진 것이 없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로 그 점은 교사들에 의한 학생들에 대한 폭력이 오랫동안 정당화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러한 학교의 권위는 패전 후 무너지기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 이전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나라가 만세일손의 천황을 중심으로 신국(神國)이며, 천황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쳤던 학교는, 무참한 패전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을 점령한 GHQ는 일본 역사의 기술을 천황 중심의 신화가 아닌, 고고학적 사실로 바꾸었고, 역사의 가치를 민주주의라는 기준으로 기술했다. 어느 곳보다도 진리에 충실해야 했을 학교가 실은 알면서도 가장 먼저 그것을 외면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아이들의 눈에는 그릇된 역사를 주입하는 학교야말로 폭력 그 자체로 보이기 시작했고, 교사를 향한 의심도 커졌다.


어찌됐건 GHQ의 강제적인 교육이념의 변경과 이에 호응하는 젊은 지식인들에 의해 제국일본의 유산은 폭력으로 비판받았고, 그 대신 평화민주주의가 새로운 가치로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되었다. 앞서 언급한 빨간두건속의 히비야 고등학교는 그런 정부의 방침이 가장 충실하게 이행되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당시의 대학생들이 그러한 평화민주주의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위선이라고 비판하며 대학을 일종의 해방구로 만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비대학생들은 이미 평화와 민주주의 놀이에 길들여져 버렸음을 선언해버림으로써, 폭력시위를 벌이는 학생운동의 종언을 예감시켰다.


실제로 3년 뒤인 1972, 같은 학생 운동 조직원을 린치해 살해한 사건(일명 아사마산장 사건)으로 학생운동이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된 이후, 일본교직원 조합이 기존의 입시 위주의 교육을 지양하고, ‘여유있는 교육을 제창함으로써, 일본의 공교육은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학생들의 경험과 인권을 중시하는 교육으로 개편되었다. 이로 인해 교사의 체벌 등이 엄격하게 제한되면서 학생들에 대한 강력한 장악력은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한편 교사 권위의 약화는 일본의 경제대국화와도 맞물린 현상이었다. 고도성장기에 접어들어 구인란에 허덕이게 된 기업들은 구직자들의 학력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오히려 구직자들의 뒤늦은 공부를 서포트하기도 했다. 학교를 그만둔다고 생존 그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일이 없게 되자, ‘퇴학이라는 카드는 이전만큼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교권 실수의 이미지는 1980년대 이후 일본의 문화콘텐츠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아다치 미치루의 <터치>나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만 보더라도, 담임선생님이라는 존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 이외에는 거의 없다. 선생님 대신 아이들이 따르는 존재는 선생이 아니라 코치인데, 그 코치들 또한 극도로 말 수가 없고, 그럼으로써 학생의 신뢰를 얻는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존재감이 없는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러한 학교의 풍경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역시 오카자키 교코의 대표작 <리버스 엣지>(1994)일 것이다. 싱글맘과 함께 사는 소녀 하루나를 중심으로, 학교 안팎에서 일어나는 이지메와 고양이 학살, 원조교제와 성폭력, 자해 등의 폭력을 충격적으로 드러내는 이 만화에서 소년소녀들의 일상 속에 어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극히 제한적이다. (학생들이 유일하게 몇 마디 나누는 상대는, 침대를 제공하는 양호선생님 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가치체계에 대한 논의, 혹은 모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게 된 교실에서 아이들은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이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사라진 교실에 와야 하는 것이 왜 하필 폭력이어야 하는가? 오카자키는 학교 안에 만연하는 폭력의 원인이 선생님의 부재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오카자키는 모든 것이 소비라는 행위로 귀결되는 80년대의 일본사회에 대해 뭔지 모를 불안에 휩싸인 소년소녀들에게 폭력은 그들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유일한 방식이란 것을, 애처롭고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터닝포인트로서 1997


그리고 <리버스 엣지>가 세상에 나온 지 3년 후인 19975월 하순, 고베시 ○○ 중학교 교문 앞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의 잘려진 머리가 발견되는데, 나이프로 파손된 입에는 사카키바라세이토(酒鬼薔薇星斗)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도전장이 물려있었다. 그 내용은 우둔한 경찰에게 살인이 유쾌하고 유쾌해서 참을 수 없는 자신을 제지해보라며 도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약 1개월 후에 경찰에 의해서 체포된 자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아이의 머리가 놓인 학교에 다니는 14세의 소년(이하 소년 A)이었다. 14세의 소년이 범인이며, 게다가 이 사건은 2월과 3월에 있었던 노상 도오리마(: 묻지마 살인사건) 사건의 일부임이 수사과정에서 밝혀지면서, 일본 열도 전체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본에서 소년범죄가 본격적으로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같은 해 11, 주로 교실내 이지메를 다룬 작품들을 묶은 시게마쓰 키요시의 나이프가 출간되었고, 이듬해에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자인 유미리가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지하실에 묻은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골든 러쉬를 발표했다. 전자가 학생들끼리의 폭력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벌이는 게임에 비유했다면, 후자는 그것을 소비사회에 찌들어 인간성을 상실한 어른들의 그림자로 본다. 이렇게 폭력의 원인에 대해서는 양자는 다른 입장을 보이긴 하지만, 실은 이들 작품은 똑같이 더 이상 소년범죄를 좌시할 수 없다고 하는 어른들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기성 작가들에 의한 소년범죄 쓰기는, 교실에 대한 어른들의 개입이 사실상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베연속아동살상사건 이후에도 1998년에는 도치기현에 13세 소년에 의한 여교사 살해사건(도치기 여성교사 사살 사건), 1999년에는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에서 18세 소년에 의한 모녀 살인 사건(히카리시 모녀 살해 사건), 2000년 사가-후쿠오카 간 고속도로에서 일17세 소년에 의한 니시테쓰 버스 납치 사건(니시테쓰 버스 납치 사건), 같은 해 오카야마에서 일어난 17세 소년에 의한 모친 살상 사건(오카야마 금속 배트 모친 살해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세기 전환기 소년범죄는 더 이상 일부 빗나간 학생들의 탈선이 아니라 일본열도 전체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01년에는 사회학자 아오야마 신지가 니시테쓰 버스 납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EUREKA>, 2002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버지를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년을 등장시킨 해변의 카프카를 발표해 큰 호평을 받았다. 양자는 모두 소년범죄를 일본사회의 특수성만으로 보지 않고, 인류 역사상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보편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어른들의 사회와의 와해를 유도함으로써 소년범죄에 대한 미디어의 흥미본위의 보도를 상대화하고, 소년들의 갱생과 재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02, 선생님의 귀환


하지만 소년들의 폭력은 휴머니즘 예술작품이 그리는 것처럼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통한 재생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후에도 소년들은 반성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이에 대한 어른들의 분노는 점점 커졌다. 그 결과, 20014, 형사처벌 대상 연령을 16세에서 14세로 낮추는 내용을 포함한 개정 소년법이 시행되게 된다.


원래 소년법은 사회학자 조크 영(Jock Young)이 말한 의미에서 포섭 사회(the inclusive society)’의 특징을 대표하는 법으로, 그것은 타자를 증오하거나 외부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타자가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 될 때까지 그들의 사회화갱생치료에 전념하는 사회인 것이다. 비행을 저지르는 소년만이 아니라, 외국인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되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 이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일관되게 지속된 일본 사회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법의 개정은, 일본사회 속에서 타자에 대한 포섭에 대한 인내가 도를 넘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자, 소년들에 대한 어른들의 개입 의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2년 개봉된 비트 타케시 출현의 <배틀 로열>은 그러한 일본사회의 정서 속에서 만들어졌다. 학생에게 칼로 찔리고도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교사가 '신세기교육개혁법(BR: 심각해지는 학급붕괴와 범죄에 노출된 청소년들을 이런 혼란상을 이겨 낼 수 있는 강력한 생존 능력의 소유자로 만들기 위해 제정된 법)'이 공표되자 180도 변신해 가차 없이 학생의 정수리에 칼을 날리거나 학생들의 목에 걸어놓은 특수 목걸이의 시한폭탄의 발화버튼을 누른다.


이는 분명 허구이지만, 그런 허구 속에서 반대로 교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교실 풍경에 현대 일본인들이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니까 <배틀 로열>은 잭나이프를 들고 다니는 학생들과 교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잡담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는 그런 교실에 필요한 것은 학생들의 인권이 아니라 비트 타케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시범케이스로 학생 하나를 죽이는 그런 선생님의 카리스마임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그저 잡담을 하는 곳이 아니라, 장래 살아남기 위한 생존 능력을 배양하는 곳임을 분명히 각인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9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에 몰아닥친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중고등학교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2002년 이렇게 선생님은 단순히 먼저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는 생존술을 터득한 자로서 교실에 화려하게 귀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 선생님은 가차없는 복수의 화신이기도 하다. 2008년 출간되어 일본사회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마츠 타카코가 주연으로 영화화된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의 충격은 담임선생님의 어린 딸을 죽인 13세 소년의 천연덕스러운 폭력에만 있지 않다. 미나토가 자신의 아이가 살해당한 부모의 입장만이 아닌, 그녀를 살해한 슈아와 나오키의 인간적인 내면을 보여준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소년들의 폭력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 하지만 담임선생 유코는 그러한 그들의 내면을 응시하면서도, 용서는커녕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응징한다. ,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가 살해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유코의 강렬한 카리스마는 <배틀 로열>의 비트 타케시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강렬하고 무섭다. 후자가 순간적인 죽음으로 문제를 가볍게 해결한다면 전자는 살아있는 동안 결코 불식시킬 수 없는 심적 고통을 집요하고 치밀하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시 픽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한 영화의 자막이 올라오는 그 순간, 그 영화의 기억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슈야와 나오키의 입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마침내 목에서 절규가 터져나올 때, 우리는 학교 밖으로 걸어나가는 유코의 영상을 또렷이 기억 저편에 가둬놨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의 모습에 덧씌우고 혼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것이 학교 폭력을 둘러싼 어른들(혹은 국가)의 개입, 혹은 그에 대한 상상력이 어떻게 업그레이드될지 계속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아닐까 <*>



『BOON』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