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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응답과 회신, 그 ‘절대적희생’의 구조 속에서의 선택

타카하시 테츠야, “야스쿠니 문제”(치쿠마 신서, 2005)  “국가와 희생”(일본방송출판협회, 2005)

31절 경축사에서 또다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를 끄집어낸 노대통령에 대해, 코이즈 총리는 전후 일본의 평화억지 노력을 주의깊게 봐달라는 짤막한 반응을 보였다. 정치-외교적 차원에서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일본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금지에 대한 요청과 이에 대한 회신은, 이처럼 서로에 대한 아무런 영향력도, 책임도 없는 채로 끝나는 모롤로그의 반복처럼 보여진다. 그렇다면 서로에 대한 의미있는 요청과 회신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는 어떤 것일까?  2005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출간된, 타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 의 “야스쿠니 문제”와 “국가의 희생”은 이러한 문제의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데리다 전공자로서도 알려져 있는 타카하시는, 타자로부터의 부름에 대한 응답책임이라는 데리다의 중기 사상적 기반을 토대로 삼아, 한국인과 중국인등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일본의 전쟁책임과 역사인식의 문제를 고민해온 일본의 중견철학자인데, 이미 한국에도 번역된 “야스쿠니 문제”는 그동안의 작업을 한점으로 수렴하는데 성공한, 이정표적인 책으로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 이 책은 약천여권이 넘는 일본의 야스쿠니 관련 서적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쉽게 갖지 못하는 일본인들에게, 야스쿠니에 관련되어있는 타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많은 분량을 시사하는데, 그와 동일한 비중으로 비일본인들에게는 야스쿠니에 대한 일본인들의 육성을 들려준다. 예를 들면, 책의 도입부에 인용된,  2002년 코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639명의 한국/일본인이 오사카 지방법원에 낸 수상의 참배 금지와 손해보상 소송에 대한, 반대측 참고인 진술로서 제시된 유족의 육성은, 한국 매스미디어를 통해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만약,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다는 사실로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야스쿠니의 아내로서는, 야스쿠니 신사가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외국의 의향에 휘둘려 수상의 참배조차 뜻대로 할수 없고, 천황폐하의 참배도 얻을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 몇배, 몇억배의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남편이 생전에 전사하면 반드시 그곳에 묻힌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사지로 뛰어든, 그 야스쿠니를 모욕하는 것은, 나에게는 내 자신을 모욕하는 것보다 몇억배의 굴욕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야스쿠니를 모욕하려면 내 자신을 몇 만번 죽이십시오. 단 한마디로 야스쿠니를 모욕하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내 자신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전신의 피가 역류해 넘쳐흘러,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사들의 피 바다가 흥건히 퍼져가는 것이 보입니다” (岩井益子)

태평양 전쟁때 남편을 잃은 유족의 이 생생한 ‘절규’를, 물론 타카하시가 단순히 일본인들도 피해자라는 주장을 위해서 끄집어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와 거의 흡사한 피해의식과 절규가 일본만이 아니라, 타이완, 그리고 중국과 한국에서도 거의 흡사한 레토릭(피바다)으로 증언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끄집어 낸 것이다.  나아가 이렇게 감정의 질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면서 배제하지 않고, 동등하게 문제화삼는 것에 의해서, 그는 ‘고유한 국민감정’이라는 부수적인 것을 처내면서, 각나라의 유족들이 느끼는 환원할수 없는 슬픔에 우리들을 직면시키려는 것이다.

즉, 가족의 죽음은 어떠한 형태를 갖추든간에,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남을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야스쿠니 신사에 묻혔다는 이유로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타카하시의 지적이다. 이런 감정적 전도야말로,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역할을 담당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그에 의하면 청일전쟁을 계기로 건설된 야스쿠니는, 거듭되는 전쟁이 낳은 ‘유족’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국민들도 스스로 국가(천황의 국가)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버리도록 만드는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하는데, 이러한 진술에서 우리는 위와 같은 레토릭으로 표현되는 감정문제의 배후에는, 한 개인의 생과 죽음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국가’라는 존재가 자리잡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야스쿠니 신사가 국민의 희생을 요청하면서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는 국민국가와 연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배네틱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읽은 적이 있는 대학원생들에게 그렇게 새로운 얘기는 아닐 것이다. 즉, 앤더슨은 국가가 국가를 위해서 죽은자를 추모하는 시설을 갖추고 셀레모니를 반복하는 것에 의해서 국가공동체를 강화한다고 지적했는데, 야스쿠니 신사 역시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렇다면 왜 타카사히는 이런 당연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거기에는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다른 나라에서는 볼수 없는 일본의 고유한 문화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배경이 있다 즉,  ‘일본에서는 현세에 무엇을 해도 죽으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며, A급 전범이 묻혀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고유한 ‘일본문화’로서 정당화하는 문화상대주의적 시각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일본에 있어서 문화상대주의는 미국의 전후처리에 대한 불만과, 문화인류학, 혹은 민속학의 유행에 의해서 증폭되었는데, 이런 견해에 대해 타카하시는 야스쿠니 신사는 적군의 영령은 말할 것도 없이, 나가사키, 히로시마 원폭과, 도쿄 공습에 의해 죽은 민간인의 영령을 배제한 채로, 오직 군인들의 영혼만이 기리는 시설이라며며 반론하며, 고유문화의 상징으로서의 ‘야스쿠니’의 의미를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야스쿠니 신사를 한국의 동작동 국립묘지 같은 국가추모시설과 동일선상에서 바라볼 수도 없다. 즉, 메이지 천황에 의해 국가시설로 설립되었던 야스쿠니 신사는, 2차세계 대전후 미군정의 관여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이 작성된 이후 강제로 종교법인화된 것이다. 따라서 헌법이 명시한 종교의 자유에 의해, A급 전범의 영령과 강제징용된 조선인과 타이완인의 영령을 이전하라고 국가가 명령할 수도 없으며, 동시에 총리가 총리의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코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외교적인 문제 이전에 일본 국내의 문제이며, 실제로 참배 이후 일본 각지에서 재일한국인과 일본인 기독교 신자들에 의한 총리에 대한 소송이 벌어져, 헌법위반의 혐의가 있다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이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집권자민당은, 총리의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기 위한 헌법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참고로 야스쿠니 신사의 국가시설화에 대한 노력은,야스쿠니 신사측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야스쿠니 신사의 ‘특수성’을 알았을 때, 우리는 야스쿠니에 대한 우리의 발언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만드는지까지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그들이 주어진 법을 지키길 원한다면, 야스쿠니 신사에 남아 있는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영령에 대해서 손을 댈 수가 없다. 반대로 만약 그들이 법을 넘어서 정의를 실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법을 어길수 있는 선례를 만들어준다는 데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야스쿠니 문제”를 읽었을 때, 우리는 타자로부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나아가 그에 책임있게 응답하려고 해도, 또다른 희생을 피할수 없다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실제로 “야스쿠니 문제”에 이은 “국가와 희생”에서 타카하시는, 이 문제를 보다 구체화하고 있다.

  인간을 희생하지 않는 공동체는 가능한가

야스쿠니의 문제를 ‘존엄한 희생’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문제성을 갖는 언어의 프리즘을 통해서 바라보려고 한 이 저작은, 이 ‘존엄한 희생’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을 희생으로 하는 문명의 근원을, 동아시아의 근대를 넘어서, 서구의 근대, 그리고 성경에까지 거슬러올라가면서 고찰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민국가비판’으로 부를 수 있는 이 저작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피’를 고귀한 것으로 여기면서 희생을 묵인하거나 찬양하는 경향이, 기독교적인 전통과 근대국가의 이해관계의 공모에 의해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는데, 그 순간, 그렇다면 인간을 희생하지 않는 공동체가 있을 수 있을까, 라는 막막한 현실에 다시 한번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타카하시는, 책의 후반부에서 자신의 사상적 스승인 데리다의 말년의 저작인 “죽음을 부여한다Donner la mort” 속에 등장하는 ‘절대적희생’의 구조를 환기시킨다. ‘죽음을 부여한다’에서 데리다는 아브라함이 신의 부름에 응하여 자식 이삭을 바치려는 성경의 얘기 속에서, 신의 부름에 순응해 이삭을 베려는 아브라함의 행동에 보이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해 책임을 지려는 자가 한순간도 도망칠 수 없는 ‘절대적희생’이 구조를 본다. 그건 ‘어떤 타자(신)에 대해서 충실하려고 하면, 다른 타자(이삭)을 희생해야만 하는’ 구조의 절대성이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적희생’의 구조 안에서 결정해야 한다, 그 외부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위대한 철학자가 환기시킨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 절대성은, 부름과 응답책임이 야기시키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신, 천황, 혹은 국가의 부름에 대한 성실한 응답은, 결코 보상받을 수 없는 희생을 야기시킬 뿐이라는 것을 우리들의 뇌리 깊숙이 각인시킨다. 비일본인들이라는 타자의 요청에 성실하게 응답하려고 한 타카하시조차 이 구조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즉, ‘전쟁책임론’과 역사인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비판적이었던 그는, 본의아니게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 일본군인들과 그의 유족의 목소리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작업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베려고 했을 때와 같은 종류의 광기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광기는, 로신이 “광인일기”를 통해 시사했던,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광기’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려는, 와야할 정의, 그리고 양심으로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광기’를 멈출 수 있는 존재가 이 구조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도 곤란하다. 즉, 그것은 애초에 누군가를 불러, 희생을 요구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성경은 그 존재만이 최종적으로 아브라함의 광기를 막을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신이 아닌 인간의 자격으로, 일본인들에게 ‘광기’와 같은 자세를 요청하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일본인들이 타카하시와 같은 ‘광기’에 빠지는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그들이 우리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그 때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우리는 정말 용서를 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죽은 자를 대리해서, 신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한 우리들이, 용서라는 또하나의 광기를 수행할 준비가?   나아가 국가를 위한 희생을 더이상 반복하지 말자는 제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국가가 없어서 희생당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연세대학원 신문 2006년 3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