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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 일본

1984년의 두 개의 달-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혹은 폭력과 사랑


 


디스토피아로서의 ‘1984’, 유토피아로서의 ‘1984’


세계 문학에서 1984년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위대한 문학자의 출생과 죽음, 혹은 문학 작품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들에게 있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지나지 않는 1984년은 세계문학에서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혹은 도래해서는 안 될 미래의 대명사로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지하듯이 1949년 조지 오웰이 발표한 1984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운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유럽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조지 오웰은, 숨을 거두기 일 년 전 자신이 떠나가게 될 이 지구의 미래를 바라보며, 이를 ‘1984’이라는 숫자에 각인시킨 것이었다. 조지 오웰의 눈에 비친 1984년은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그 세계 속의 인간들은 빅브라더라는 존재에 의해 가장 내밀한 영역까지 감시당하는 존재로 축소되어 있는데, 이러한 어두운 전망은 사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인류가 공들여 만들어왔던 정치제도와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대량학살로 이어지게 된 1,2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이제부터의 인류 역사가 19세기 유럽인들이 꿈꿔왔듯이 그렇게 장밋빛 미래는 아닐 것임을 뼛속 깊숙이 각인시켰으니까. 그러니까 유럽 문명이 개발해왔던 관료제와 테크놀로지의 진화는 단순히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행복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소거시키고 말지도 모른다고.


2016년 실제로 조지 오웰의 예언은 상당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미래에 아시아가 부재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즉 당시 그의 세계관 속에 아시아가 유럽을 위협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동안에 아시아의 미래는 더할 나위 없이 불투명했다. 특히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도 2개의 원자폭탄을 맞고 마침내 패전해, 미국에 의해서 점령이 된 일본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따라서 그런 일본이 1980년대 초반 세계의 유토피아로서 인식될 줄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른바 Japan as No.1이라는 베스트셀러 책 제목이 시사하듯 1980년의 일본은 경제로서 세계를 재패했다. 도요타와 소니로 대표되는 일제 상품들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며 세계자본을 일본으로 집중시켰고, 이는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거의 강제로 달러 대비 엔화의 가치를 격상시키기 전까지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1984년의 일본이라는 국가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20세기의 서구적 역사관을 대표하는 1984의 한계를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살아있는 지구의 유토피아로서 이미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이미지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80년 후반 일본의 자산가치가 정점을 찍은 이후,버블이 붕괴되기 시작해 90년대부터는 만성적인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인구는 노령화되었고 젊은이들의 실업률은 점점 높아졌으며, 주변국들의 경제성장은 곧 자국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이대로 가면 일본의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출간된 것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이다. 그러니까 이 책이 출간된 2009년의 관점에서 봤을 때, 버블의 정점을 향해 줄기차게 내달리고 있었던 1984년의 일본은 그야말로 그들이 상실한 유토피아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유토피아와 근대일본의 문학


그렇다면 2009년의 하루키가 1984년의 일본에 대해서 쓴 것은 다른 일본인들처럼 하루키 역시 강했던 일본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하루키 독자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의 과거로의 시선은 전혀 특별할 것이 없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로 대표되듯이 하루키의 작품은 이전부터 상실된 것에 주목해왔기 때문이다물론 1979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으로 데뷔한 하루키는, 일견 일본에 도래하는 이른바 후기자본주의사회를 긍정한 작가로 비춰지곤 한다. 재즈와 자동차, 온갖 종류의 의류 메이커, 심지어 스포츠 활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세계는 일본이 생산하는 나라에서 소비하는 나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키가 무조건적으로 동시대의 소비문화를 긍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을 둘러싼 모험댄스 댄스 댄스등에서 하루키는, ‘돌고래 호텔돌핀스 호텔로 변해가는 이른바 세계화 속에서 자신의 친구 역시,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상실된 양남으로 변해갔음을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이미 도래하고 있는 후기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이 버블의 정점에 도달한 1987, 하루키는 아직 자본주의가 뼛속까지 스며들지 못했던 1960년대 후반의 일본을 회고하는 노르웨이의 숲을 써서 일약 스타 작가가 된다. 자본이 사방으로 흘러넘쳐 그 낙수효과만으로도 얼마든지 도처에 널린 쾌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1980년대, 하루키는 갑자기 시계추를 폭력적인 학생시위로 인해 학교가 폐쇄되었던 1960년대 일본의 대학가로 돌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계기로 불감증에 빠진 나오코라는 여성과 그녀와 관계를 맺지 못해 안절부절 한 젊은이와의 사랑 얘기를 쓴 것이다.


물론 이미 지나가버린 젊은 시절을 아름답게 회상했다는 이유만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유토피아나 소설로 분류할 수는 없다. 과거에 대한 강한 향수를 느끼며 이에 정념을 불어넣는 것은, 실은 노화할 운명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늘 해오고 있는 일 아닌가. 서구의 문학 텍스트가 아직 도래하지 않는 미래를,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로 적극적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습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노르웨이의 숲에는 미래에 대한 어떠한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요소들은 지금 여기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특권적으로 미화될 뿐인 것이다. 하지만 80년대의 일본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른시공을 집요하게 탐색하며 미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가 유토피아라는 장르에 매우 친화적임을 노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80년대부터 하루키는 동시대 일본의 문화적 변동을 따라가기보다는 지금 여기에 없는것들을 집요하게 탐색해왔다. 실은 1980년대부터 일본의 문화계는 냉전기 서방세계의 보편적인 문화 형태로서의 팝과 재즈에서 일본가요로, 세계문학보다는 만화를 중심으로 하는 서브컬처와 게임으로 가파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더 이상 비틀즈에 열광하지 않게 된 일본을 전경화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90년대 초반 한국에서 하루키의 소설이 매우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인식된 것은 동시대 일본의 문화적 변동이 한국에 실시간으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일 뿐, 실은 일본에서 하루키의 매력이란 이미 한물 간 문학올드 팝을 마치 반짝거리는 신세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는 하루키의 눈에 80년대 이후의 일본이, 일본에 대한 전세계의 호의적인 평가와는 반대로, 좋았던 그 무엇인가, 특히 보편적인 감수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것처럼 비춰졌던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노르웨이의 숲을 통해 하루키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일본은 유토피아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현재를 부정하고 '지금 여기에 없는' 과거의 삶의 의미를 복원하고자 하는 경향은 실은 하루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된, 명실상부한 제국으로서 각광받기 시작하는 시기 이래로, 나쓰메 소세키나 모리 오가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같은 일본의 문학자들은 근대라는 시공 속에서 무엇인가 상실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근대가 가져다주는 것보다는 상실되는 것에 더욱 크게 보였던 그들에게, 미래는 앞당겨야 할 유토피아보다는 도래하지 않았으면 하는 티스토피아로 보였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근대가 가져다주는 기술적, 문명적 진화가 파국적인 종말에 대한 불온한 이미지로 그려지면 그려질수록 지나간 과거가 옛날 좋았을 때로서 이상화되고 만다는 점이다지나간 과거를 이상화하는 일본 특유의 분위기는, 일본의 근대화가 혁명이 아니라 유신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정치적 권력을 상실하고 조용히 재야에 묻혀 있던 천황을 호출함으로써 막을 연 일본의 근대화는, 그것이 잘 진행되면 될수록 정신사적 시간은 과거로 흘러가는 역설적인 구조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근대천황제의 뒤틀린 시간적 구조는 근대문학사에서도 확인된다. 서구의 문예사조를 착실하게 이식해오던 근대문학의 흐름은,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문학진영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근간이 되는 고전을 찾아 재해석하는 문예부흥 운동으로 급전환하고 말았던 것이다.


요컨대 일본의 근대문학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서구의 문학작품 속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라는 개념에 강하게 매혹되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가 함의하고 있는 시간성, 미래를 직시는 자세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일본문학이 유토피아를, 다가올 미래에서가 아니라 이미 상실된 과거에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그들이 근대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루키 역시 현재와 미래보다는 과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탐닉하는 과거가 근대의 외부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앞서 언급한 일본인 작가들과는 일선을 긋는다. 즉 그는 서구라는 근대적 가치체계에 의해서 상실한 일본 특유의 그 어떤 것을 찾기 위해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일본이 여전히 보편적인 가치와 이어지고 있었던 끈을 찾기 위해서 과거로 간다. 하루키가 1984년을 호명한 것은 이 해가 바로 세계문학의 걸작인 1984이라는 보편성과 이어지고 있다는 이유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폭력과 유토피아


그렇다면 1Q84가 그리는 1984년의 일본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는 1Q84와 조지 오웰의 1984의 관계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1Q841984는 그 작품명의 유사성은 말할 것도 없이 최대의 수수께끼인 리틀 피플의 존재가 1984의 빅브라더와 대비되는 형태로 이야기 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관련을 가진다. 동시에 이는 양자를 구별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하루키가 그리는 1984년의 도쿄에는 조지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처럼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국가나 정치권력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국가권력은 사적 공간과 명확한 거리를 유지한다. 이를 대표하는 소설적 표식이 개인의 현관문을 두드리기만 하는 NHK 수납원의 존재이다. 전후일본국은 국가의 정치적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 NHK의 수신료 징수시 국가에 의한 강제집행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국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경우 TV를 거부한다면 수신료를 내지 않을 권리가 시민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1984년의 도쿄는 빅브라더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를 함부로 허무는 1984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공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키가 1Q84를 통해 1984년의 일본이 당시의 세계인들과 일본인들이 생각했듯이 유토피아적 요소가 많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루키의 문제의식은 빅브라더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1Q84속에서 발발하는 폭력은 빅브라더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부부의 침실과, 가족의 휴일, 종교단체의 사유지에서 벌어진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아오마메와 덴고는 바로 이러한 곳에 고이고 썩어가는 폭력에 노출되어 어린 시절의 중요한 시절을 보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서로에 강하게 끌려, 마침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폭력에 대해 저항하는 길을 걷게 된다.


물론 하루키가 가시화하는 이러한 폭력은, 전쟁과 아이슈비츠, 테러, 난민학살 등과 관련해서 최근 인문학에서 주로 다루는 폭력에 비한다면 매우 하찮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지젝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키가 다루는 폭력은 그야말로 주관적 폭력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폭력에 대한 개인의 응수는 대중영화 속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고, 이러한 정념과 행동의 정당화는 결국 국가의 감시체계와 공권력의 강화라는 정책 반영을 뒷받침하는 데 전용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사적공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폭력을 근거로 어떤 세계의 불완전성을 전경화하는 것은, 종종 권력 측의 사적 공간의 개입의 정당화로 전용될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고, 이것이야말로 빅브라더의 출현을 앞당기는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빅브라더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와 사회주의를 일종의 절대적 폭력공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 역시 지젝이 지적한 바 있듯이 마치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여기를 마치 낙원인양 무한 긍정하게 만들고 만다는 측면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예컨대 이는 북한 체제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 종종 남한 체제의 폭력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만들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1984년의 일본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가시화하며 그 자체로 매우 심각한 문제로 다뤄가는 1Q84』를 통속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이 소설은 유토피아적인 기획이 어떻게 폭력적인 형태로 전회하면서 세계를 디스토피아로 변모시키는가를 1960년대 전공투 학생 운동의 후일담에 근거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폭력적인 학생운동을 거부하고 평화적인 종교단체로 거듭난 선구의 이미지가, 1995년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든 옴진리교를 모델로 한 것임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적된 바 있다. 피를 흘리는 폭력을 지양하고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적 활동이, 폭력적인 메시아의 등장으로 이어진다는 역설. 이는 비단 옴진리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Q84는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에세이 폭력비판론로부터 촉발된 폭력 담론들 속에서 읽을 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벤야민은 폭력을 법제정적/유지적 폭력과 법파괴적 폭력으로, 신화적 폭력과 신적폭력으로, 피를 흘리는 폭력과 피를 흘리지 않는 폭력으로 나눈 바 있다. 이러한 벤야민적인 폭력 분류에 따르자면 1Q84는 일견 법의 보호 속에서 평화적으로 성장해간 종교단체의 폭력성(신화적 폭력)과 법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목적하는 타겟을 정확하게 저쪽 세상으로 보내는 아오마메라는 킬러의 폭력성(신적 폭력)을 각각 대비시키며, 과연 어떤 것이 더욱 폭력적인 것인가를 묻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는 법으로서의 국가와 이기적인 유전자의 소유자인 개인, 유토피아적 사고와 디스토피아적 현실 인식 중 어떤 것이 더욱 폭력적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자, 궁극적으로는 과연 폭력을 통해서 이 양자를 구별해도 괜찮은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1Q84를 통해 보이는 폭력에 대한 하루키의 입장이, 피를 흘리는 폭력의 대안으로서의 신적 폭력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벤야민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분노에서 촉발된 아오마메의 폭력적 행위를 신적 폭력으로 보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리틀 피플의 폭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후카에리라는 매력적인 소녀의 말을 통해서 드러나는 리틀 피플은, 죽은 산양의 입을 통해서 하나둘씩 나와서 그녀의 복제를 만들고, 그 복제물을 통해서 자신의 말을 이 세계에 전달하고자 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초월적인 힘을 가진 폭력적인 종교 지도자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이다. 하지만 하루키 스스로가 말했고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텍스트 속의 리틀 피플의 존재는 여전히 많은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이 세계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후카에리의 아버지인 선구의 리더의 말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 빅브라더가 매우 체계적으로 폭력을 관리하고 독점함으로써 폭력적인 존재가 되었다면, 리틀 피플은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기보다는 폭력을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전달하고 분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 전자의 목적이 공동체 구성원들이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의 가능성을 완전히 소거시킴으로써 스스로의 권력 유지라는 데 있다면, 후자는 폭력의 독점보다는 선과 악, 빛과 그림자라는 이원론적인 세계의 균형 유지를 위해 그것을 배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 정도이다.


요컨대 1984속의 빅브라더적인 폭력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평화와 폭력, 허구와 사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라는 이 이원론적 경계를 붕괴시키고 일원화하는 과정 속에서 유발된다면, 1Q84속의 리틀 피플적인 폭력은 일원론적인 세계를 이원론적 세계로 분열시키는 과정에서 가행된다. 1984에서 각기 다른 인간들이 빅브라더의 감시와 통제, 조직 하에 개별성을 상실한 거죽만 남은 인간으로 통합되어간다면, 리틀 피풀이 있는 1Q84에서는 하나의 달이 두 개의 달로, 하나의 신체를 가진 인간이 마더와 도터로 분열되고, 국가폭력 대신에 종교 단체의 폭력과 개인의 폭력이 충돌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양쪽 세계 다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법의 정신에서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순수성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세계의 외부를 상정하는 유토피아적 행위 속에 감춰진 폭력성을 경고한 자크 데리다처럼, 1Q84역시 폭력 없는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소설 속의 하루키의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빅브라더가 없는 공간을 실현한다면 폭력 없는 세계가 도래할 수 있다는 식의 믿음, 다시 말해 허구가 만들어내는 디스토피아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현실세계 속에서 유토피아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데 있었던 것일까.


유토피아에서 사랑을 구출하기


자 그렇다면 과연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와 관련해 더 이상 어떤 가능성이 우리들에게 남아 있을까. 그리고 IQ84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시사점을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이 소설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폭력을 추방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어떻게든 폭력을 피할 수 없는 이 잔혹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폭력을 멈출 수 있는가로, 한발 물러나고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다면 그건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한다는 체호프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세계 속에는 이미 총이 주어져 있으며, 그것은 폭력 행사가 이미 우리 내부 안에 하나의 잠재적 선택으로 주어져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하루키는 일단 이러한 체호프의 말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이를 거슬러 내 손에 쥐어진 권총을 어떻게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루키는 폭력 중지의 가능성을 오직 사랑에서 찾는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폭력의 화신이 된 아오마메가 이 폭력의 연쇄를 끊는 길은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오직 덴고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를 깨달은 아오마메가 덴고와 해후하기까지의 긴 종반은, 이 소설이 근본적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하나의 로맨스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유토피아적 기획이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낳고,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절망이 더 강력한 유토피아를 부르는,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의 탈출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사랑을 유토피아적/디스토피아적 사고의 외부에 두고 싶어 하는 하루키의 관점은,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랑을 통해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하는 여러 시도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식시키기 어렵다. 예컨대 사랑을 통한 공동체의 결속이야말로 서구 기독교가 오랫동안 주장해왔었던 것은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그것은 국가에서 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광범위하게 확장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을 통한, 사랑에 의한 존재의 확인은 매우 근대적인 유토피아의 방식을 답습하는 데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사실 그렇다.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여러가지 폭력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몇 되지 않는 카드임은 분명하다. 예컨대 사랑예찬이라는 에세이에서 알랭 바디우는 늘 정체성의 문제를 부각시켜가며 차이를 말살하는 세계화한 자본주의앞에서는 사랑도 위협받게 됨을 지적하면서, “법을 위반하고 법에 이질적인 것들 안에서 사랑을 보호할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이는 평화와 안전을 미끼로 나와 다른 존재를 경계선 밖으로 추방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오늘날의 풍조 속에서 사랑의 소임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상기시킨 말인데, 이는 1Q84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 이미 법을 위반하고 스스로의 손에 를 묻힌 아오마메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덴고의 사랑 이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결국 1Q84를 통해 하루키는 폭력의 외부를 지향하는 어떠한 유토피아도 거부하고, 오히려 잠재적 폭력성을 사랑을 통해 잠재우기를 제안한다. 그러한 사랑 안에서만 비로소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찾아온다고, 말이다. 이는 마치 비틀즈나 존 레논의 노래가사처럼 우리를 훈훈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그 실효성에 봤을 때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루키 문학의 한계로 지적받고 있는 대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루키의 세계관은 지난 세기 유토피아적 기획이 낳은 비극의 후유증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위안을 제공해주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