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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금 다시, 열정으로서의 문학을

지금 다시, 열정으로서의 문학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이 치열한 무력을자음과 모음, 2013.

 

 

1. 지금 혁명을 말한다는 것-‘혁명을 구원하면서 1퍼센트의 가능성에 걸기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 모음, 2012)이라는 단 한권의 책을 통해 한국 사회에 조용하지만 뜨거운 파문을 일으켰다. 그 원인은 글쓰기와 혁명이라는, 얼핏 보면 가장 거리가 먼 듯 느껴지는 두 개념이 실은 하나로 묶여 있음을 밝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데리다나 말라르메, 블랑쇼에 친숙한 독자라면 글쓰기, 혹은 책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혁명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독자들도 한국에서는 비교적 소홀하게 다루어진 종교적 문맥을 통해 책과 혁명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사키에게 신선한 충격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특히 루터와 무함마드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내내 반복되는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닙니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라는 후렴구는, 독자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달궜을 뿐만 아니라,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에게 망각되고 있었던 그 무엇인가를 상기시키지는 않았는지.

 

 

 

 

 

조지프 히스의혁명을 팝니다라는 서명이 시사하듯, 지금 우리는 혁명이란 말이 더 이상 어떠한 효과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IMF 이후 기업들이 혁명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전유하면서 혁신이란 말로 이데올로기화 한 이래로, 혁명을 입에 올리는 것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최근의 이석기와 통진당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혁명이라는 말이 처한 위치를 단번에 전경화시킨 상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겠다. 혁명에 대한 냉소 혹은 부담이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분위기에서 당당히 혁명을 외치는 사사키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글쓰기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토록 만들지 않았을까. 설사 진정한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혁명이란 말을 말 본연의 뜻으로 구원하고, 유지하기. 그러한 글쓰기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어진 것은 아닐까.

 

사시키가 상기시킨 것은 2000년대 한국 인문학계가 가라타니 고진에서 아즈마 히로키로 이어지는 일본 사상에 강하게 매료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그 무엇과도 관련된다. 물론 그들의 근대성과 포스트모던에 관한 퍼스펙티브가 한국 인문학에 활력을 불어넣고 많은 기여를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이론을 따라갈수록, 문학을 향한 열정도 함께 시들해졌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사키에 의한 가라타니의 근대문학 종언론과 아감벤의 주권론 비판이 지나칠 만큼 격양되어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독일어 성경을 쓰기로 착수한 루터가 ‘95퍼센트는 완전한 문맹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는 사사키의 말에서, 우리는 이론적 엄밀함에 대한 열망이 불가능성에 대한 꿈, 그러니까 혁명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있었음을 사후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사사키는 현대 일본사상의 흐름을 계승한다기보다는, 실은 거스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가라타니와 아사다, 아즈마 히로키로 이어지는 일본 현대사상은 혁명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문학은 이미 죽었다는 전제 하에 출발한다. 그들은 문학의 가진 5퍼센트의 가능성에 걸기보다는, 95퍼센트가 이미 향유하고 있는 자본과 국가, 웹과 데이터베이스를 직접적인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지식인이 자신의 언어세계 속에서 빠져나와 대중들의 변화를 끌어안았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충분히 혁명적이었지만, 한편으로 지금 여기로부터 활로를 뚫어가는 비약과 도발의 언어에 대한 관심을 멀어지도록 만들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사키의 문제성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2. "사람을 발정케 하는 문체의 힘"과 철학적 성찰 사이에서 줄타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이어 혁명과 사상가들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문학에 초점이 맞춰진 대담과 강연으로 구성된 이 치열한 무력을은 조금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이 대담이라는 형식이 사사키의 매력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다.

 

 

 

 

대담자의 입을 통해서 차례로 구체화되고 있는 사사키의 매력은 그가 철학자이자, 소설가이며, 동시에 힙합의 작사가이기도 할 정도로 다재다능하다는 점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대담자들은 그의 단점들을 거침없이 지적한다. 그의 두 편의 소설이 야전과 영원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만큼 재미가 없다-이는 재미가 없기 때문에 재미있다는 뜻이기도 한데-는 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얘기한다. 뿐만 아니라 책 읽기가 곧 혁명이다라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 전용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가가미 아키라는 사사키의 혁명론이, ‘“혁명에 혹하면서도 막상 책임지고 나서려는 사람은 별도 없어서 반쯤은 자격지심을 담고 있는 세대들에게 딱 좋은 변명거리로 비춰질 수 있다고 말해 사사키를 쓴웃음 짓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사키의 언어에 쏟아지는 기대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사사키에게 사람을 발정케 하는 문체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치카와 마코토의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사사키의 문체가 일종의 선동적인 효과를 분명 갖고 있음을 매우 구체화한 문장으로, 엄밀함을 추구하는 사상적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치명적인 결함을 노출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99퍼센트의 압도적인 현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1퍼센트의 가능성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이 기술을 과연 선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는 멸망하고, 세속화되는 세계 속에서도 자신을 방기하는 대신, 글쓰기의 영원 쪽에 목숨을 건 파울 첼란과 사카구치 안고, 그리고 후루이 쪽으로 우리들을 데리고 가려고 한다. 나아가 그는 재난이라는 압도적 현실앞에서 스스로를 방기하는 대신, 그러한 현실을 이용하려고 하는 그 누군가를 탄핵하고, 그리고 그를 위한 싸움을 시작한 자신을 변론하기 위한, 그러한 글쓰기가 당장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스스로 이를 실천한다.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향해 읽는 이를 발정케 하는 사사키의 말은, 선동이라기보다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러한 사사키의 포지션은 현대 일본의 사상가 중에서 매우 특이하며, 때문에 위태롭게 보이는 면도 있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코제브나 아감벤을 이류, 삼류 헤겔주의자로 딱 잘라 재단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푸코적인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는 훈육, 실러적인 미학 개념을 통과시켜, ‘우리는 훌륭하게 제조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으로 결론짓는 방식 등이 훨씬 논란의 여지가 있다. 미학과 생정치를 무리하게 같은 지평에 놓고자 하는 이러한 행위와 관련되어서는 푸코와 생정치를 보다 구체적으로 다룬 야전과 영원-현재 안천이 꼼꼼하게 번역중인-을 보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철학에 문학을, 문학에 철학을, 혹은 정치에 미학을 도입하려는 사사키의 시도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사사키의 도발은, 각각의 영역의 전문가들의 눈에는, 다카하시 겐이치로 말을 빌리자면 까불고 있는’, 혹은 열받게만드는 듯이 비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일본에서 사사키가 개척하고자 하는 새로운 포지션이자, 현재 한국 인문학에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단연컨대 그것은 결코 융합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롭다기보다는 매우 오래된 인문학적 전통을 추적하고 계승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련되지 않고 고리타분하지만, 우리 모두를 부끄럽고, 때로는 열 받게 만들면서도, 이상하게 끌어당겨 책상 앞에 앉히고 뭔가를 바꾸기 위해 읽고, 쓰도록 만드는 힘을 발굴하고 계승하고 유지하는 것. 그것은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한 압도적 현실앞에 직면했던 선배작가들-예를 들면 김수영과 황지우-를 통해 우리가 이미 경험했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너무나도 멀어진 듯한 문학=혁명을 향한 정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분간 사사키 아타루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왕이면 야전과 영원만이 아니라, 구하전하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의 번역과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자음과 모음, 2013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