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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밥과 달리기





작년부터 살이 찌고 빠지지 않게 되었다. 내게도 이런 날이 찾아올 줄이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늘어나는 뱃살을 방치했던 나는, 솔직히 조금 뿌듯했던 모양이다. 


튼실히 부풀어 오르는 배는, 내 지난 날의 궁핍과 고생이 다 끝났음을 말해주는 증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 '어둠'의 시절들을 종종 떠올리며 감회에 젖곤 했다. 그러니까 집을 떠나 일본에서 혼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배부름이 아니라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밥을 먹던 시절의 기억들, 아무리 맛있는 밥이더라도, 그저 허기를 달래는 그저 한끼의 칼로리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기억들을,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 시절 그렇게 허기를 느꼈던 적은 없다. 한국에 비해 적은 양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그 시절 나의 문제는 '밥'이 아니었다. 한끼 '밥'을 위해서라면 나는 회사를 그만둘 필요도, 한국을 떠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밥'을 위해서라면 책을 읽을 필요도, 글을 쓸 필요도 없었다. 


밥을 위해서라면 돈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잘 벌 수 있는 곳에 계속 있으면 된다. 점심을 주고, 그것도 모자라 간식을 주는 선릉역 근처의 회사에서 하루 종일 엑셀표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되었다. 혹은 다른 일을 하면 되지, 굳이 책과 글을 택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오직 '먹고살기' 위해 온전히 내 삶을 바치는 것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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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을 떠난 동안, 한국은 더 풍요로워졌지만 밥은 더 소중해졌다. 작가들이 맛있는 밥의 묘사에 공을 들이고, TV에서는 요리사가 스타가 되었고, 각종 맛집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고, 심지어 여행의 목적이 '밥'이 되었다.  밥을 만드는 수많은 밥집이 생겼다가 망했고, 또 생겨나고는 망했다가 생겨났다. 왜냐하면 모두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사실 이 '먹고살기즘'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는, 한국에서 '먹고살기' 위해서란 명목 하에 행해졌던 수많은 악행을 떠올려보면 된다. 옛날에는 먹고살기 힘들어 사기를 쳤다는데, 지금도 '먹고살기'로 사기를 친다. 더 잘 먹기 위해 아저씨들이 타는 자전거의 행렬을 아침부터 여기저기에 볼 수 있다.  저녁이면 외제차 대신 자전거가 즐비하게 서 있는 고깃집을 지날 때마다, 결국 그들의 '밥'타령이란 그런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중년이 지나면 하루 두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세계에서 터득한 나름대로의 '먹고사는' 법인 셈이다. 


나도 중년이 지나면서 배가 나왔고, 배나온 중년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보건소에서 대사증후군 관리를 받으라고 통보를 보내왔다. 설마 내가 이런 중년이 될지 몰랐어, 하면서도 마치 처음 주민등록증 받으러 가는 소년의 심정으로 보건소에 갔었다. 물론 그들은 말뿐이었고, 내 배는 들어가지 않았고, 그 때부터 내 안에 잠자고 있었던 허기를 본격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책도 안 읽히고 글도 써지지 않는 밤, 밥을 달라는 아우성이, 내안 깊숙한 곳에서 울려퍼졌고, 어떤 음식도 맛있었다. 아무리 맛있어도 그저 한끼 밥인 것이, 신체를 지배하고, 영혼을 지배하고, 시대를 지배하고 싶어서 아우성이었고, 그 아우성이 얼마나 절박했던지, 나도 나를 내주었다. 한 밤의 야식, 아침의 토스트, 점심의 간편한-그러나 결코 만만치 않은- 도시락 회의, 다 먹고살자고 하는 저녁의 회식까지, 밥은 끝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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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찌니 몸에 부력이 생겨서, 수영이 쉬워졌지만, 쉬워진 수영으로는 살이 빠지지 않았다. 괜찮아, 일본에 다녀오면 빠지겠지,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일본 출장을 가도 예전처럼 걸을 일은 없고 밥은 맛있으니 체중이 줄 리가 없다. 누가 회는 괜찮다고 했는가, 화를 내보기도 하다가, 마침내 삶의 모든 고민이 '밥'으로 환원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기도 하구나, 깨닫게 되었을 때, 밥에서 놓여나기 위해서 결국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면서 그렇게 잘 먹었지만 예전 같지 않은 무릎, 그렇게 잘 먹었지만 예전 같지 않는 호흡, 그렇게 잘 먹었지만 예전 같지 않은 기억력을 하나씩 하나씩 몸으로 느낀다. 학창시절 육상부였을 때도 이렇게 힘들었던지, 고등학교 시절 천미터를 만점 받을 때도 이렇게 하늘빛이 노랬는지. 도쿄의 공원을 달렸던 그 해 겨울에도 이렇게 땀이 비오듯 쏟아졌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나이의 하루키가 왜 마라톤을 뛰고도 모자라 100킬로 마라톤 대회에 나갔고, 그럼에도 그의 소설에는 어째서 늘 파스타 뿐인지는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겨우 런링머신 위에서 수십분 뛰어본 것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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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주만에 배가 들어가고, 신기하게 살이 빠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신기한 것은, 그 심한 허기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게 밥을 달라는 아우성조차 튕겨내는 격심한 육체의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밥으로도 만족되지 않는 더 큰 허기에 직면했기 때문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아니, 조금 더 달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