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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멋진 신세계



            

"왜 비슷한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까?"
"우리의 세계는 <오셀로>의 세계와 같지 않기 때문이야. 강철이 없이는 값싼 플리버 승용차도 만들 수 없어. 사회의 불안정이 없이는 비극을 만들 수 없는 것이야.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니 노령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상도 없어
. 그들은 조건반사 교육을 받아서 사실상 마땅히 행동해야만 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뭔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 자네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창밖으로 집어던진 것 말일세. 자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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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지. 하지만 우리가 우연히 알파로 태어나면 우리의 병은 비교적 큼직한 공간을 제공하지. 보다 좁은 공간에 머물게 되면 우리는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될 거야. 상류계급의 샴페인 대용액을 하층계급의 병 속에 부어 넣을 수는 없는 거야. 그것은 이론적으로 명백해. 하지만 실제로도 증명된 사실이야. 사이프러스 섬에서 시행한 실험결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어."
"그게 무슨 실험이었습니까?" 야만인이 물었다.
무스타파 몬드는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재투입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실험이지......"

올더스 헉슬리, 이덕형 옮김,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1988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이어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읽은 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었다. 전체주의의 폭력을 다루는,이 동일 계열의 작품들을 나란히 놓고 봤을 때,  헉슬리의 작품이 가장 신선하고 균형잡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헉슬리의 작품에 비하면 하루키는 전체주의의 맛만 낼 뿐이며, 조지 오웰은 지나지게 무겁게 전체주의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도 헉슬리의 미덕은, 전체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감시하고 속박하기 이전의 문제로서 , 그것이 각 개별적인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출발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 있다. 즉, 만약 인간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진실이나 미, 평등, 혹은 사후의 구원이 아니라, 개개인의 심적 안정과 행복이라고 본다면, 인간은 그것에 가장 빠르게 이르는 길을 적확하고 빠르게 찾을 수 있으리라고, 헉슬리는 전제한다. 그 길이란, 개인의 심적 안정과 행복을 위한 조건들을, 과학의 도움을 받아 사회 전체의 시스템 상에서 완비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이다.
 
그 사회에서는 고유한 기억이나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부모, 일부일처제와 출산은 모두 배제된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텍스트들, 세익스피어의 비극들, 성경들도 모두 금고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신 유전자의 능력에 맞는 교육과, 일자리를 부여하고, 프리 섹스가 권장된다. 그래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소마라는 약물을 투입한다. 이 세계에서 개성이란 코카콜라를 먹는가 펩시를 먹는가, 오늘밤 두 명의 파트너와 잘 것인가 한 명의 파트너와 잘 것인가, 라는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된다.

턱없이 허무맹랑하게 보이는 세계이지만, 실은 그 세계 안에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있다는 점에서 헉슬리의 소설은 놀랍다. 좀더 멋졌으면 하는 부모, 몇 명이나 있어야 할 섹스 파트너, 말 잘 듣는 아이, 내 능력에 맞는 교육과 일, 다른 계급들에 의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듣고 싶지 않은 심정. 죽음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이런 것들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골치아픈 일들을 일순이라도 정지시키고 마음의 평온을 안겨줄, 합법적인 약물. 이런 것들에 대한 집요한 욕망은, 헉슬리가 이 글을 쓸 때와 별 다를 바 없을 뿐만 아니라, 실은 훨씬 더 강해졌다는 것은 오늘날 나오는 소설과 티비 뉴스나 드라마를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하나의 자연으로서 받아들이는 능력이, 여전히 서툴거나, 혹은 이전보다 훨씬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자연"이 만들어졌다고 인식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런 세계관 속에 살아온 우리 자신은, 어느틈에 차이를 자연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맘만 먹는다면 무엇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고, 바꿀 수 있으며, 지금보다 좀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데미안이나 이성복 시집을 들고 다니며, 자신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절망하던 시절이 바로 어제 같은데, 말이다.

근데 그래서 좀더 행복해졌는지는 알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