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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미국인의 얼굴  어제 일본의 각 미디어들은 일제히 오사카의 도톤보리라는 개천에서 건진 한 인형에 주목했다. 이 인형은, KFC 가게 앞에 서 있는 샌더스 마네킹인데, 1985년 오사카의 한신 타이거즈가 리그 우승을 했을 때, 열광한 팬들이 개천에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오사카 한신 타이거즈는 24년간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는데, 좌절될 때마다 팬들은 "커넬 샌더스의 저주" 때문이라고 중얼거리곤 했단다. 따라서 오사카 사람들은 도톤보리에서 이 인형을 찾아냈다는 것을 곧 "커넬 샌더스의 저주" 가 풀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기뻐한다고. 이 기사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야구가 아니다. 물론 오사카 사람들이 왜 야구에 열광하는지, 혹은 열광은 어째서 징크스를 만들어내는지도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 더보기
누가 얼마 받는지를 알아야만 그 삶의 의미를 아는, 불쌍한 것들을 남기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신 후, 나는 몇 개의 기사를 뒤져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 학생들과 같이 읽었다. "서임"이라든지 "선종"이라든지 하는 어려운 단어가 있었음에 불구하고,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건희 전 삼성 회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이름만 기억해주길 바랬다. 무엇보다도 명동성당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일요일마다 친구들과 시를 읽으러 명동성당 카톨릭 회관으로 가곤 했는데, 어느 가을날 일요일에는 데모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나는 경찰들이 에워싼 명동성당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얼른 데모가 진압되어 친구들과 만나길 기다렸는데, 데모는 끝내 진압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알게.. 더보기
로고스의 한 양식 : 오컴의 면도날 필연성이 없는 한, 복수의 사물을 세우지 않는다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 ☞ 오컴이 특별한 한정을 붙이지 않고, '필연이다', '불가능이다', '가능하다'라고 말할 때에는 '신의 전능'이라는 관점 하에서, 이러한 양상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 "신의 전능을 가지고 행한다면 가능한가 아닌가"의 판단에는, "신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가능하다"라는 기준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 사태의 기술도, 기술의 부정도 모순되지 않는다면, 그 사태는 생기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즉 우연적이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오컴은 사태를 기술하는 논리(로고스) 측에서 양상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 오컴적으로 표현하자면, .. 더보기
재는 기계 그러나 사실이 그렇게 불명료한데도, 야시키와 카루베, 둘다 각각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만은 명료하다. 하지만 이 나 한 사람에게 명료한 것이 어디까지가 현실로서 명료한 것인지 어디서 어떻게 잴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에는 모든 것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기계가 끊임없이 우리들을 재고 있고, 그 재어진 채로, 또 우리들을 밀어부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의심하면서 내일이 되면, 일이 모두 끝나서 편하게 되는 것을 예상하고, 돌아오는 임금을 받는 즐거움을 위해서 다시 피로도 싸움도 잊고 그 날의 일을 끝내버리면, 마침내 내일이 되어서 또 누군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사건에 만나야 했다. 요코미쓰 리이치, 기계, 1931. 일본 문학에서 "기계"라.. 더보기
남은 밥 또 길게 체류하는 손님을 좋아하게 된 경우, 그녀들은 손님의 밥상에 남은 것을 자신의 밥상에 옮겨서 식사를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밥상인 경우다. 여자의 밥상 위의 것은, 본능적으로인지 알수 없지만, 쳐다도 보지 않는다. "병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고, 더럽지도 않아"라고 그녀들 중 한 사람은 그녀들에게 말하면서 젓가락질을 한다. 게다가 이 여자다운, 그리고 가정적인 모습을 끝까지 관철시키기 위해서일까. 한 사람의 남자가 남긴 건, 그녀들 중 한 사람만이 계속해서 먹는 것이었다. 이것은 언제부터인지는 알수 없지만, 그녀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이런 얘기는, 손님에게는 결코 흘리지 않는 그녀들의 비밀이지만, 밥상 위에서도 바람둥이는, 역시 오키누였다. 오키누가 상류의 집(창녀촌)으.. 더보기
지향성에 관한 추억 z 「지향성」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예의 수수께끼(이념적/보편적인 것과 경험적/개별적인 것과의 관계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지)가 해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지향성」이란 그것에 의해서 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물어야 할 수수께끼가 있음을 지시하는 문제개념에 다름아니다. 즉, 각각 독자의 신분을 지니는 이념적/보편적인 것과 경험적/개별적인 것이, 「지향성」을 매개로 해서 「지향적내재」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묶여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사태인가? 사이토 요시미치, 후설-기원의 철학, 코단샤, 2002 십년 전 압구정동에서 H와 J와 만났을 때, 우리가 지향성에 대해서 얘기했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 때의 나는, 국문과로 전업한 H.. 더보기
'시적인 것', 시와 시적언어 사이의 길. 그러니까, 을 과학적 아이디어들의 장에 위치시키는 것이 참된 것이 되려면, 시적인 앎과 과학적인 앎 사이의 경계가 흐려져 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하겠지요. 그 시적인 앎/과학적인 앎의 경계를 분명하게 가르는 사람들의 주장을 반증하게 되면 저의 이야기도 끝나게 되겠습니다. ↑ 황지우, '시적인 것', '신호', 223 '시적인 것'이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라면, 시는 '보면서 보여주는 것'이므로, 무엇인가를 지시해야만 할 것이다. 무엇을 지시하는가? 이것은 다시, ''시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실체적 속성에 관한 질문을 불러들이지만, 그는 '시가 허구적이므로 비지시적'이라는 논리실증주의적 입장을 비파하면서 '시적인 것'의 개념이 '마땅히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중략)..."시적 진술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