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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귀 한국에 갔을 때, 무심코 아버지의 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아버지, 귀가 커졌잖요! " 내 말에 다들 정말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어릴 적, 삼형제 중 유일하게 나만이 아버지의 닮은 꼴이라고 불리곤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가 각자의 방식으로 퇴화를 시작했다. 폭식과 폭주와 담배와 운동을 좋아하고, 잠이 없는 아버지의 피부는 60이 넘으면서 한꺼번에 쭈그러들었고, 술을 멀리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늘어지게 자는 나는 동년배에 비해 퇴화의 속도가 비교적 늦다는 얘기를 듣는다. 따라서 요새 우리가 닮았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우리 둘이 닮았다는 것을 여전히 말하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남들이 늘 지적하는, 우리둘의 큰 눈이 아니라, 바로 작은 귀였.. 더보기
미시마 유키오 VS 전공투 미시마의 영문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전공투와의 토론 영상을 발견하고, 한참 보면서 웃었다. 글로 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화상 속의 분위기를 보니, 뭐랄까 음성언어가 수록된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를 툭툭 쳐내고는, 세월이 지나면서 한없이 무거워지고 말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그 느낌은, 유튜브의 이 영상 밑에 달린 다음의 코멘트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혁명의 시대" 따윈 없다. 모든 게 "놀이"였다." 물론 이런 코멘트는 "냉소주의"라고 비난 받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좌파와 우파가 만나서 화기애애하고, 진지하게 사상적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 이 토론의 본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근대를 초극한다는 것, 그 일점이 중요하다고 하.. 더보기
도쿄의 마라톤 붐 한국이 야구 열기로 들끓던 22일, 도쿄에서는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선수들만이 아닌 일반인도 달렸던 이 대회에서는 3만 5천명이 참가했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경쟁율이 7.5배를 넘었다고 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달릴 수만 있다면 10만엔이라도 기꺼이 내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며, 이 대회를 위한 법인을 설립하겠다는 도쿄 도지사의 말을 인용했다. 그 말 중에는, 추천 운이 없는 셀레브등을 위해 기부금에 의한 특별 자격을 마련하자는 구상도 있어서 관심을 끌었다. 돈으로 경험을 산다..... 그건 물론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돈의 목적이,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을 돈으로 살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때, 마라톤 역시 하나의 대상일 수 있겠다. 하지만 왜 하필 오늘날, 이런 극.. 더보기
미국인의 얼굴  어제 일본의 각 미디어들은 일제히 오사카의 도톤보리라는 개천에서 건진 한 인형에 주목했다. 이 인형은, KFC 가게 앞에 서 있는 샌더스 마네킹인데, 1985년 오사카의 한신 타이거즈가 리그 우승을 했을 때, 열광한 팬들이 개천에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오사카 한신 타이거즈는 24년간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는데, 좌절될 때마다 팬들은 "커넬 샌더스의 저주" 때문이라고 중얼거리곤 했단다. 따라서 오사카 사람들은 도톤보리에서 이 인형을 찾아냈다는 것을 곧 "커넬 샌더스의 저주" 가 풀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기뻐한다고. 이 기사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야구가 아니다. 물론 오사카 사람들이 왜 야구에 열광하는지, 혹은 열광은 어째서 징크스를 만들어내는지도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 더보기
누가 얼마 받는지를 알아야만 그 삶의 의미를 아는, 불쌍한 것들을 남기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신 후, 나는 몇 개의 기사를 뒤져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 학생들과 같이 읽었다. "서임"이라든지 "선종"이라든지 하는 어려운 단어가 있었음에 불구하고,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건희 전 삼성 회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이름만 기억해주길 바랬다. 무엇보다도 명동성당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일요일마다 친구들과 시를 읽으러 명동성당 카톨릭 회관으로 가곤 했는데, 어느 가을날 일요일에는 데모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나는 경찰들이 에워싼 명동성당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얼른 데모가 진압되어 친구들과 만나길 기다렸는데, 데모는 끝내 진압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알게.. 더보기
전향: 이론-원리중독자들의 작은 세계 표 (1) 전향에 대한 일반적 이해 표 (2) 전향에 대한 요시모토 타카아키의 이해 일반적으로 "전향"이라는 말은 사상이나 정치적 신념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본의 경우에 "전향"은, 1920-30년대, 국가 공권력의 탄압이란 외적 요인에 의해서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사회주의적 입장을 포기하게 된, 일련의 사건의 핵심 키워드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표1) 이런 문제로서의 "전향"은, 패전 후 일본의 지식인들이 왜 우리는 질수 밖에 없는 무모한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혹은 왜 일본인들은 전쟁을 막을 수 없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주목받게 된다. 즉, 한 인간의 사상적 자유가 왜, 그리고 어떤 식으로 포기되었는가-를 추적함으로써, 1920-45년까지의 일본사회의 문.. 더보기
로고스의 한 양식 : 오컴의 면도날 필연성이 없는 한, 복수의 사물을 세우지 않는다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 ☞ 오컴이 특별한 한정을 붙이지 않고, '필연이다', '불가능이다', '가능하다'라고 말할 때에는 '신의 전능'이라는 관점 하에서, 이러한 양상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 "신의 전능을 가지고 행한다면 가능한가 아닌가"의 판단에는, "신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가능하다"라는 기준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 사태의 기술도, 기술의 부정도 모순되지 않는다면, 그 사태는 생기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즉 우연적이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오컴은 사태를 기술하는 논리(로고스) 측에서 양상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 오컴적으로 표현하자면, .. 더보기
게임적 문학의 시도 : 리셋 가능한 생(生)의 가능성 ☞ 순문학의 독자가 다양한 계급이나 연령에 걸쳐있다고 하는 것은, 순문학이 현실을 그리고 있다고 하는 기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그러한 기대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을 둘러싼 보도 기사이다. 그들 기사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소설의 내용이 사회문제와 결부되어 말해진다. 미스테리나 호러는 오락을 위해서 읽지만, 순문학은 오락이 아니라, 사회를 알기 위한(예를 들면 NEET나 재일 한국인의 현재나, 독신 여성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교양으로서 읽는다고 하는 전제가, 일본에서는 반년마다 재강화된다. ☞ 1995년 이후, 필자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동물의 시대"라고 부른 시대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복잡한 이상이나 허구가 아닌, 단순한 현실을 찾기 시작했고, 순문학은, 문학적 실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