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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 앙큼한 고양이의 매력, 혹은 소설 쓰기의 현장 100년 넘도록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나쓰메 소세끼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인 『吾輩は猫である』(1905~6)가, 서은혜에 의해 『이 몸은 고양이야』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해방 이후만 하더라도 이 원작은 1962년 김성환에 의해 『나는 고양이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래 『나는 고양이로다』(최을림 역, 중앙출판사, 199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유유정, 문학사상사, 1997) 등으로 번역되어 왔지만, ‘나’를 ‘이 몸’으로 번역한 것은 획기적인 시도로,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 번역자의 해설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번역 의도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일단 이 번역이 고양이 화자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칭대명사 ‘나’로 환원해.. 더보기
국가의 위기와 인문학적 상상력 우치다 타츠루 『길거리의 전쟁론』, 미시마사,2014(内田樹,『街場の戦争論』ミシマ社,2014』) ‘국가의 위기’라는 새로운 과제 오늘날 인문학은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문학자들의 당연한 사명처럼 인식되어온 국민국가론 비판이 수그러들고,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글이 다수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는 많은 지식인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지난 이십여 년간 세계적으로 진행된 글로벌화로 인해 국가의 역할이 눈에 띄게 축소되면서 사회보장의 축소로 대표되는 국민들의 피해가 표면화되고 있는 상황에 기인한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에 국가가 어떤 위기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장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더보기
금지되어 있는 일을 굳이 하려고 한다면 요새 한국문학이 재미없어졌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문학이 재미있었던 시절, 문학은 ‘어떻게’ 재미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일본문학이 가장 뜨거웠던 1960년대 중반에 발표된 쿠라하시 유미꼬(倉橋由美子)의 『성소녀(聖少女)』(서은혜 옮김, 창비 2014)는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성소녀』는 당대 일본사회의 강한 정치성의 자장 속에서, 글쓰기의 정치성을 모색해가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일교조’라는 ‘교육노동자’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데 반발해 학교를 그만두고 ‘18금(禁)의 세계’로 치달리는 소녀 미키와, 한때 일본공산당 산하 조직에 있었지만 이제는 미국으로 가려고 전전긍긍하는 K. 우리에게도 분명 그리 낯설지 않은 이러한 ‘반사회적’ 성격의 등장인물들이 아직 ‘리얼리티’를 .. 더보기
지금 다시, 열정으로서의 문학을 지금 다시, 열정으로서의 문학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이 치열한 무력을』 자음과 모음, 2013. 1. 지금 ‘혁명’을 말한다는 것-‘혁명’을 구원하면서 1퍼센트의 가능성에 걸기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 모음, 2012)이라는 단 한권의 책을 통해 한국 사회에 조용하지만 뜨거운 파문을 일으켰다. 그 원인은 글쓰기와 혁명이라는, 얼핏 보면 가장 거리가 먼 듯 느껴지는 두 개념이 실은 하나로 묶여 있음을 밝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데리다나 말라르메, 블랑쇼에 친숙한 독자라면 글쓰기, 혹은 책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혁명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독자들도 한국에서는 비교적 소홀하게 다루어진 종교적 문맥을 통해 책과 혁명의 문제를 풀어.. 더보기
색채가 없는 하루키와 그가 '세계문학'에 입성한 해 1. 일국문학도 세계문학 아닌 하루키? 최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속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억관 옮김, 민음사 펴냄)이 포함된 것을 놓고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노벨문학상에 다가가기 위한 작가의 야망과 출판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세계문학전집 수록이 결정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인데, 이는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할 질문임은 분명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제공하지만 하루키를 세계문학 전집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의 문학성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소중한 기회가 되지는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한국에서 하루키의 문학은 일국문학과 세계문학 바깥에 있는 듯한 착시 현상과 함께, 지나치게 특권적인 위치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후반 .. 더보기
'피로사회'에서 '피로사회'로 올 상반기에 많이 회자되었던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이제 읽다. 여러가지로 유익한 대목이 많았지만, 아감벤에 대한 지나친 의식이 조금 안타까웠다. 물론 나로서는 저자의 아감벤 비판에 대해서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다음 대목: 아감벤은 주권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폭력의 공간구조적 변화를 전혀 포착하지 못한다. 성과사회의 한복판에서 아감벤은 주권사회를 기술하고 있다. 아감벤 사상의 시대착오적 성격은 여기서 기원한다. 이러한 시대착오로 인해 그가 추적하고 폭로하는 폭력은 오로지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정성의 폭력에 국한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에 특징적인 긍정성의 폭력, 고갈과 포섭으로 표출되는 폭력은 아감벤의 시야를 벗어난다. ...(중략)...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더보기
실타래를 쥔 고양이처럼 세속화의 기관으로서의 놀이는 도처에서 쇠퇴하고 있다. 현대인이 더는 놀 줄 모른다는 것은 새로운 놀이와 기존의 놀이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증가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실제로 춤이나 파티같은 놀이에서 현대인은 자신이 거기에서 찾을 수도 있는 것(잃어버린 것의 축제에 다시 접근할가능성, 성스러운 것과 그 의례로의 회귀)과 정반대의 것을 필사적으로 집요하게 찾는다. 그것도 스펙터클한 신종종교나 시골 무도회장의 탱고 레슨에서와 같은 어리석은 의식의 형태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의게임쇼는 새로운 예배의식의 일부이다. 이런 게임쇼는 종교적 의도를 무의식적으로 환속한다. 놀이에 그 자체의 순전히세속적인 사명을 되돌려주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과제이다.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더보기
매개로서의 화폐가 붕괴될 때 이마무라 히토시, 『화폐 인문학-괴테에서 데리다까지』 지난 10년 동안 데리다와 바디우, 지젝 등의 ‘정의’에 관한 저작들이 차례차례 소개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한국의 출판 시장에서,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륙 쪽 사상을 배경으로 쓰여진 정의론과 달리 영미 쪽 사상을 배경으로 쓰여진 샌델의 ‘정의’가, 정의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화폐를 끌어온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물론 화폐를 통해서 정의를 얘기하는 이런 지적 작업들은 지나치게 경제론적 관점에서 정의를 보기 때문에, 화폐가 그 자체로서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