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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달리기 ▶ 작년부터 살이 찌고 빠지지 않게 되었다. 내게도 이런 날이 찾아올 줄이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늘어나는 뱃살을 방치했던 나는, 솔직히 조금 뿌듯했던 모양이다. 튼실히 부풀어 오르는 배는, 내 지난 날의 궁핍과 고생이 다 끝났음을 말해주는 증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 '어둠'의 시절들을 종종 떠올리며 감회에 젖곤 했다. 그러니까 집을 떠나 일본에서 혼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배부름이 아니라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밥을 먹던 시절의 기억들, 아무리 맛있는 밥이더라도, 그저 허기를 달래는 그저 한끼의 칼로리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기억들을,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 시절 그렇게 허기를 느꼈던 적은 없다. 한국에 비해 적은 양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그 시절 나의 문제는 .. 더보기
사라진 선생님들은 어떻게 귀환하는가 1.학교와 폭력 일본의 문화콘텐츠 속에 학교는 어떠한 모습일까? 영화 나 , 혹은 만화 「슬램덩크」로 대표되는 청소년기의 풋풋하고 낯간지러운 사랑과 훈훈한 우정으로 가득 차 있는 학교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나 에서 보듯이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잡담을 하거나, 대들고 주먹다짐을 벌이다가 마침내 칼을 휘두르는, 살벌한 풍경의 학교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어느 쪽이 ‘리얼’에 가까울까? 양 쪽 모두 허구로 구축된 세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양쪽의 허구는 모두 어느 정도의 사실에 기반을 둔 것임도 놓쳐서는 곤란하다. 그러니까 사랑과 폭력은 어떤 ‘리얼’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허구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리.. 더보기
1984년의 두 개의 달-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혹은 폭력과 사랑 디스토피아로서의 ‘1984’, 유토피아로서의 ‘1984’ 세계 문학에서 1984년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위대한 문학자의 출생과 죽음, 혹은 문학 작품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들에게 있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지나지 않는 1984년은 세계문학에서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혹은 도래해서는 안 될 미래의 대명사로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지하듯이 1949년 조지 오웰이 발표한 『1984』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운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유럽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조지 오웰은, 숨을 거두기 일 년 전 자신이 떠나가게 될 이 지구의 미래를 바라보며, 이를 ‘1984’이라는 숫자에 각인시킨 것이었다. 조지 오웰의 눈에 비친 1984년은 그리 낙관적이지는.. 더보기
老眼 예전 같으면 저녁 10시부터 초롱초롱해지던 눈이, 갑자기 침침해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아침인 경우가 빈번해졌다. 노안이 찾아온 것도 그 때 즈음이었다. 그 전 해였던가, 출석부를 보다가 갑자기 글자가 안 보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경을 들기 시작했다던 S의 말을 들을 때만 하더라도 그저 웃어넘겼는데, 어느 틈에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물론 변명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작년 여름부터 자야하는 아이를 위해서 일찌감치 집안을 껌껌하게 해놓고 kindle로 글을 읽곤 했던 것이 치명타였던 것 같다. 껌껌한 밤에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는 것은 나름 즐거웠으나 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눈이 침침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스마트기기를 레티나 디스플레이 등으로 바꿔보거나, 눈에 좋다는 약을 먹고, 밤.. 더보기
알라딘 중고서점의 일어판 푸코 약속보다 너무 일찍 합정역에 도착해서, 어디로 갈까 두리번거리다가 알라딘 중고서점을 발견하고 들어와봤는데, 어라 의외로 괜찮은 걸.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외국서적 쪽에서 의외의 책을 발견하고 냉큼 집어서 계산대로 가지고 가니, 점원이 "이거 왜 이리 비싸죠 ?" 하고 반문하더니 이것저것 조사해보고는 납득한 듯이 말한다. "들어와서 한번도 나간 적이 없어서 그래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계산을 끝낸 후, 6월 19일에 볶았다는 케냐 AA의 드립커피를 주문한 후에 테이블에서 책을 펼치면서 생각했다. 그치, 애초에 일어판 미셸 푸조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연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대체 누가 왜 사서는, 왜 팔았을까? 뭔가 흔적이라도 있을 법 싶어서 책을 이리저리 훑어봤는데도, 책은 깨끗했다. 도대.. 더보기
그의 시를 읽으며 견디는 며칠... 너는 금속 세공사의 아들이었고 너는 아파트 수위의 아들, 나는 15톤 덤프트럭 기사의 아들이었으므로 또 새봄이 온 데다 공업고에 가야 했으므로 우리는 머리색을 노랗게 바꿔야 했다 박 준, 잠들지 않는 숲,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또 새봄이 온 데다" 바빠져, 밀린 일을 하기 싫어 빈둥거리며 시집을 읽다가, 위의 구절에서,,, 뭐 단순히 금수저/흙수저 얘기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뭔가가 바로 "또 새봄이 온 데다"이다. 그러니까 "~의 아들이었으므로 공업고에 가야 했다"라는 흔한 담론의 질서에, 시인은 "또 새봄이 온 데다"를 슬며시 껴넣음으로써, 담론의 질서를 뚫고 나가 이를 가지고 논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희들은 모르지, 공업고에 .. 더보기
발언권에 대한 생각 발언권이 주어진다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수업에서, 회의에서, 식사 자리에서, 짧은 미팅에서 내게 주어진 발언권을 모조리 행사한 후, 마침내 내가 확인하게 된 것은 오늘 내가 뱉은 말들이 결국은 소용없었고, 소용없으리라 하는 자각이었다. 특히 오늘 2,3시간을 함께 한 선생님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웃고만 있어서 더욱 그랬다. "선생님, 오늘 왜 말이 없으셨어요?" "저는 원래 말이 없어요." 말없이 놓인 잔을 비우는 선생님이 부러웠고, 이 선생님의 말을 듣고 싶어졌다. 하지만 말씀이 없으시다. 듣고 싶은 선생님이 침묵하는 동안, 오가는 다른 말들은 그저 성가실 뿐이다. 차라리 나는 왜 그렇게 말이 많았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편이 낫다.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인문학의 무력함과 그 무력함에 .. 더보기
페이스북과 정치성 시절이 하수상해서인가, 자기검열이 심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미묘한 뉴양스의 차이를 지닌 글들이 서로 논쟁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나는 종종 구별없이 에 클릭한다. 이건 열심히 쓴 글이라, 이건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생각해볼 만한 것이라, 이건 재미있어서, 이건 슬퍼서, 혹은 반가워서, 등등의 이유 모두가 로 하나로 수렴된다. 때론 도 하지만, 내게 그 의미는 모두에게 '공유'를 원한다기보다는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런 식으로 자기 변명 같은 걸 하다가, 사상의 일관성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내가 어느 쪽인지 묻다가, 그 반대쪽은 지울까 하다가 말다가, 누군가로부터 왜 그 딴거에 좋아요를 눌렀냐는 핀잔마저 들으면서, 결국 자기 검열 같은 말을 떠올리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