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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글쓰기와 윤리

 

 

 

지난 가을 다음과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쓰려고 하다가 쓰지 못했다.

 

"새 수영장을 구했다. 1층에 있는 수영장으로 저물녁에 수영을 하고 있으면 석양이 보이기도 한다...."

 

새 학교에 있는 수영장은 1층에 있다. 이 학교에 올 때까지 느꼈던 석연치않은 불안은, 이 수영장을 보는 순간 바로 해소되었다. 충분히 책을 넣을 수 있는 연구실에, 1층 수영장이라니. 나는 내게 찾아온 이 행운을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다. 수영을 하면서 나는 종종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을 떠올렸고, 그 때마다 더러 물을 마셨었다. 수영을 끝낼 때면 세월호 이후의 글쓰기란 이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쓰는 일보다 삭제하는 일이 많아진 대신,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늘어났다. 정작 수영장은 1년치를 끊어놓고도 일주일에 한 번도 못 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창비에서 불러, 세월호 1주기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나는 후쿠시마 이후의 일본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죽은 자를 말하는 윤리에 대해서 말했지만, 내가 얻은 새 수영장과 그곳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새수영장의 맑고 깨끗한 물 속에서 빠른 물살의 차갑고 컴컴한 바닷물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수영장에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사놓고 힘들게 겨우 읽고 글을 마무리하긴 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은 가슴에 더욱 묵직하게 쌓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타인의 시선엔 내가 더 '생산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생산성'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길 포기함으로써 나온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성에 의해서 말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을 판가름하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행위. 이른바 선택과 집중의 산물로써의 글쓰기. 이는 분명 '생산적'이지만 기능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새 수영장을 구했다. 1층에 있는 수영장으로, 저물녁에는 수영장이 빨간 석양에 물들어가곤 한다. 레인 가에 서서 숨을 고르며 빨간 서해의 낙조를 보다보면, 짧은 인생 동안 경험했던 이러한 '사치'의 목록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곤 한다...."

 

그 사치의 경험은 2008년 결혼과 리먼 쇼크 이후 봉인한 것이었다. 내 삶의 변화 속에서 더이상 이러한 '사치'를 떠올릴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도 한몫 했지만, 어쩌면 시대와의 영합은 아니었을까? 왜 나는 피츠제럴드처럼 다 무너져가고 있는 세상에서 여전히 다이야몬드에 대해서 쓰지 못한 것일까? 내 윤리의식이란,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수영장에 가는 일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달이 지나자, 어깨가 올라가지 않는다. 참다 못해 어제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부황을 떴다. 그렇게 누워 있다보니, 짧은 인생 동안 경험했던 이러한 '고통'의 목록들도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한번도 그것에 대해서 쓰려고 진지하게 시도한 적이 없었다. 무덤까지 가지고 갈 만큼의 비밀도 아니지만, 내 고통 따위는 쓸 만한 것은 아니라고, 일찌감치 나는 정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정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유도되었고, 그 유도를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나는 내 인생의 결정적인 시점에서 나의 고통보다는 타인의 고통을,  타인의 사치보다는 나의 사치를 이야기하도록 유도되었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수영장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한의원에서 침맞고 부황 뜨는 얘기도 질색이다. 무엇을 써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