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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로고스의 한 양식 : 오컴의 면도날





필연성이 없는 한, 복수의 사물을 세우지 않는다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


☞ 오컴이 특별한 한정을 붙이지 않고, '필연이다', '불가능이다', '가능하다'라고 말할 때에는 '신의 전능'이라는 관점 하에서, 이러한 양상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 "신의 전능을 가지고 행한다면 가능한가 아닌가"의 판단에는, "신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가능하다"라는 기준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 사태의 기술도, 기술의 부정도 모순되지 않는다면, 그 사태는 생기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즉 우연적이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오컴은 사태를 기술하는 논리(로고스) 측에서 양상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 오컴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이 그런 마음만 먹으신다면, 태양도 서쪽에서 뜰 수 있다(가능하다)라는 식이 됩니다. 이렇게 자연의 항구성이나 단순성도, 기술상 모순만 없다면 오컴의 면도날에 의해서 짤려 나갑니다.

☞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통상의 절약 원칙으로써 사용되는 면도날은, 자연의 단순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항상성도 단순성의 하나의 요소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건, "보다 적은 원리로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선택한다"고 하는 이유는, 그 이론 쪽이 자연의 구조를 보다 단순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 쪽에 뭔가 단순하면서도 넓은 현상을 커버하는 구조가 있으리라, 하는 생각이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오컴의 면도날 수정판은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고스를 둘러싼 또 하나의 흐름-로고스를 세계 혹은 자연 측의 구조에서 구하는 경향-의 근세적인 나타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미즈 테츠로,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것 - "말과 사물"의 계보학", 2008





녹슨 머리통에 기름을 치려고, 간만에 손에 쥔 철학서 한권에서, 많은 것을 얻는다.

로고스, 즉, "왜"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이야기가, 서구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요점들을 정리해주는 책인데,  내가 잘 모르는 중세-근세 쪽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게 곤혹스러웠지만, 기쁨이기도 했다.

기독교 출현 이후의 로고스 인식 변화와 그에 대한 수도승들의 대응들은, 근대적 언설이 만들어낸 고정관념과는 달리 반드시 고리타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소쉬르 이전의 언어인식과 관련된 논쟁-이를 테면 신의 언어는 음성언어인가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것인가, 세계가 먼저인가 말이 먼저인가, 언어는 보편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등-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건 저자의 발견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예를 들면 오컴은, 현실-자연적 질서보다는 신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하는 논리로서의 말 쪽에 우위를 둔 수도자였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오늘날의 이해와는 달리, 원래 오컴의 면도날이 잘라내는 것은 자연-현실 쪽인 셈이다. 즉, 오늘날 통용되는 오컴의 면도날설은, 근세의 자연과학자들의 편의에 근거한 이해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의 주장이 옳은지 틀린지 논증할 길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전지전능하신 신이 그럴 마음만 먹으신다면"이,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설이 아니라, 하나의 훌륭한 논리로 받아들여졌을 거라는 지적은, 꽤 음미할만 하다.  즉, 전능하신 신이 그럴 마음만 먹으신다면, 이라는 문장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있는 듯하고, 따라서 그에 대해 사고를 열어놓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일테면 신이 그럴 마음만 먹으신다면-이라는 말에서, 그럴 마음이 좀처럼 없어 보이시는 신의 냉소, 이미 마음 먹었는데도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신의 절망, 같은 것을 이미 읽어냈을 현명한 수도승들의 갈등 같은 것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 갈등의 밤에, 혼자 묵묵히 말의 면도칼을 가는 그런 풍경들 같은 것도.